▲ 경광서원 전경
◇기획시리즈를 다시 연재하며

안동은 유교의 본향으로 일컬어지는 영남의 중심지역으로 예로부터 유교문화의 본산지로 주목받아 왔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 유교적 학문과 이념을 재생산하고 세월의 여과 없이 성인의 사상을 보급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천년의 세월 동안 시대가 바뀌면서 훼철과 복설의 반복된 서원의 역사에서 안동의 서원은 면면히 한국정신문화의 1번지, 선비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안동시민의 자긍심 속에는 천년선비 문화를 주도했던 서원이 그 중심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사림활동의 구심체로서 정치적·사회적으로 일정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했다. 정치적으로 서원은 중앙의 정치 문제에 대해 향촌 사림의 여론을 수렴하는 거점이었다. 서원의 사회적 역할은 사림의 향촌 활동과 관련되어 있었다. 유향소와 향교를 대신해 향촌 사회의 중심 기구로 부상한 서원은 사림의 가장 핵심적인 향촌 학문의 전당이었다. 현재 경북의 서원은 143개소로 그 중에서 안동의 현존서원은 24개소로 가장 많다. 대경일보는 지난해 15회에 걸쳐 한국정신문화의 원류, 안동의 서원을 직접 찾아 유가의 도(道)와 선비의 체취를 느끼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 후속으로 경광서원, 호계서원, 임천서원, 청성서원, 기양서원, 임호서원, 유암서원 창렬서원, 근성서원, 동산서원을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1. 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경광서원(鏡光書院)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는 마을의 지세가 거문고처럼 생겼다고 하여 금지(琴地)라고 불리다가 김성일이 옮겨와 검제로 고치고 한자로는 금계(金溪)라고 했다. 서후면 남동쪽에 경광서원이 위치해 있다.

◇연혁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2리 92번지에 있는 서원이다. 금계리(金溪里) 동편 사천(沙川) 위에 옛날 유정사(有定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사림에서 1568년(선조 1년)서당을 세웠다.
1662년(현종 3년) 경광정사(鏡光精舍)로 개칭하였으며, 1649년(인조 27년)춘파리사(春坡里社)를 창건하여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와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의 위패를 봉안했다. 1686년(숙종 12년) 서원으로 승격되어 다시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위패를 모시고 함께 제향하였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7년 복설되었으며, 매년 9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구조
강당 앞쪽의 측면으로 나 있는 문을 통해 경내에 들어서면 강당이 서 있고, 그 뒤쪽으로 지형에 맞춰 사당영역이 배치되어 있다. 두 건물은 일직선상의 축에 앉아 있으며, 중간에 영역을 가르는 내삼문이 위치하고 있다. 집의 구조와 마루 등의 짜임에서 구재를 사용한 흔적들이 보인다.

◇사당
‘존현사(尊賢祠)’라고 현판이 붙은 사당은 강당의 뒤쪽 조금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기와집으로 측면에는 풍혈판을 붙였다. 주칸에는 쌍여닫이판문을 달고, 협칸에는 외여닫이판문을 달았는데 상부에 문의 윗부분에는 살을 넣어 변화를 주고 있다. 사당으로 출입하는 내삼문은 3칸 규모에 평대문 형식으로 만들었다.

◇강당
경광서원 현판 이외에 ‘숭교당(崇敎堂)’이라는 현판이 마루에 걸려있는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이다. 중앙의 3칸은 마루를 깔고 전면은 문을 달지 않고 개방하였으며, 후면으로는 각각의 칸마다 쌍여닫이판문을 달았다. 마루의 좌우에 방이 연결되어 있는데, 좌측의 방은 한통으로 되어 있으나 우측 방은 가운데에 벽이 있어 한 칸 규모의 방이 두 개 나란히 붙어 있다.
마루에서 양쪽방의 입면을 보면 좌우가 다른데, 이는 기둥의 위치부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문은 외여닫이장지문과 쌍여닫이장지문으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숭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되며 협실은 향사 때 헌관실로 사용되고 있다. 신문은 향사 때에만 열어 제원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매년 9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대지 500평, 전답 4,000평, 임야 5정보 등이 있다
방들의 위에 여러 현판이 걸려 있는데 좌측에는 박약재(博約齋)와 경의재(敬義齋), 우측에는 여담재(麗潭齋)와 시습재(時習齋)라고 쓰여 있다. 동서재가 따로 없기 때문에 강당에 딸린 방들이 그 역할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배향인물

·배상지(裵尙志, 1351~1413)
본관이 흥해이고 자는 부전, 호는 백죽당으로 정평공 손홍량 선생의 외손자이다. 고려말에 판사복시사를 지냈으나 조정이 문란함에 벼슬을 버리고 안동 금계에 퇴거해 있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비분강개하여 두문불출 하였다. 뒤에 병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실기 1책이 있다.

·이종준(李宗準, 1454~1499)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민(太庭逸民)·장육거사(藏六居士). 안동 서후 출생. 만실(蔓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승직(繩直)이고, 아버지는 시민(時敏)이며, 어머니는 현감 권계경(權啓經)의 딸이다. 홍준(弘準)의 형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일손, 권오복 등과 사귀었다.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1등 3인으로 급제하여,1488년 홍문관교리로서 대재학 서거정의 추천으로 사가독서했다. 이어 성균관전적, 경상도지사, 사헌부지평을 역임하고 1493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시명(詩名)을 떨쳤다. 이듬해 의성현령으로서 <경상도지도>를 제작하고 봉록을 털어 향교를 중수하며 학문 진흥에 힘썼다. 당시 그는 풍류로 명성이 있어 일본호송관 또는 북평사(北評事)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고, 의정부사인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역을 지나다가,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 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 이승건(李承健)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譏弄 : 헐뜯고 농간함)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였다.
마침내 연산군은 그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 국문 도중 죽었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부제학으로 추증되었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유고≫가 있다. 시·서·화에 능하였고, 그림은 매(梅)·죽(竹)을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유작은 없다. 현재 장식화풍으로 그려진 <송학도 松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점이 그의 전칭작품으로 전하고 있다.

·장흥효(張興孝, 1564~163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행원(行源), 호는 경당(敬堂). 부장(部長) 팽수(彭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김성일(金誠一)·유성룡(柳成龍)을 사사하고, 뒤에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이 높았다.
관계진출을 단념하고 후진의 교도에 전념하여 제자가 수백명에 달하였다. 특히, 역학(易學)을 깊이 연구하여 호방평(胡方平)의 ≪역학계몽통석 易學啓蒙通釋≫의 분배절기도(分配節氣圖)를 보고 오류된 것을 의심, 이를 고증, 연구하여 20년 만에 십이권도(十二圈圖)를 추연(推演)하였다.
12월을 배열하고 24절후를 분배하고, 또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세월일진(歲月日辰)의 수를 그 위에 더하여 <일원소장도 一元消長圖>라 하였는데, 장현광(張顯光)이 이를 보고는 “참으로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라고 극찬하였다.
문하에 이휘일(李徽逸) 등 학자가 있다. 1633년에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교지가 도착되기 전에 죽었다. 뒤에 지평에 추증되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경당문집≫이 있다.

<자문위원>
한학자·정신문화발전연구위원 이희특, 동화작가 김일광, 시인 하재영

<참고문헌>
경북서원지(개정판)·국학진흥원 편, 안동의 지명유래·안동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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