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 … 임천서원(臨川書院)

임천서원(臨川書院)은 안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가까운 안동시 송현동 740번지 호암마을에 있다. 시내 송현동 호암마을의 주택지를 지나 골목을 따라 언덕을 오르니 임천서원이 보인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주변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있으며 임천서원 강당 앞마당에는 학봉 선생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본 대마도(對馬島: 쓰시마)에서 가져 온 석창포(石昌蒲)가 430여 년째 의성김씨 종택과 임천서원에서 자라고 있다.

◇연혁
경북 안동시 송현동에 있는 서원이다. 1607년(선조 40년) 안동부(安東府) 임하현(臨河縣)에 임천향사(臨川鄕社)를 세우고 제향해 오다가, 1618년(광해군 10년) 서원으로 승격하여 임천(臨川)이라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620년(광해군 12년) 위패를 호계서원(虎溪書院)의 전신인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배향(配享)함에 따라 주원(主院)이 폐지되었다. 1847년(헌종 13년) 사림에서 주원으로 석문정사(石門精舍) 서쪽에 홍교당(弘敎堂)을 낙성하고 복설하였는데, 1909년(순종 3년) 위패를 숭정사(崇正祠)에 봉안(奉安)하여 학봉 김성일을 제향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과 9월 초정(初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강당인 홍교당이 1985년 경북문화자료 제16호로 지정되었다.

◇구조
서원은 야산을 등지고 지형에 따라 건물들의 배치가 고저차를 보이며 앉아 잇는데, 강당과 사당의 좌향이 거의 직각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내에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동서재가 대칭으로 앉아 있고, 강당이 마주한다. 강당의 우측으로 돌아 올라가면 남동간을 바라보고 사당영역과 전사청이 위치해 있다.

◇사당
숭정사(崇正祠)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맞배기와집으로 단청을 하고 겹처마로 꾸몄다. 전열의 주초를 팔각으로 다듬어 사용하였으며, 기둥도 전열만 두리기둥으로 하였다. 각 칸의 문은 쌍여닫이로 만들고, 건물 앞 우측에 정료대가 놓여 있다.

◇강당
홍교당(弘敎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팔작기와집으로 상부는 5량구조에 겹처마로 꾸몄다. 중앙의 3칸은 마루로 되어 있는데 전면에는 사분합 들어열개문을 각각의 칸에 달았으며, 후면은 쌍여닫이판문이 나 있다. 마루 좌우에는 통칸으로 된 온돌방이 대칭으로 연결되며, 마루와 방 전면에 길게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방은 전면에는 쌍여닫이창으로 되어 있고, 마루에서의 출입문은 각각 칸마다 삼분합 들어열개 불발기문으로 하였다. 방의 측면으로도 교살광창과 외여닫이문이 있어 통풍과 채광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마루의 전면 문위에도 교살광창을 기둥과 기둥 사이에 꽉 차게 내어서 문을 닫았을 경우 채광이 되도록 하였다.

◇동재·서재
강당 앞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동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기와집으로, 전면의 반 칸은 툇마루로 출입을 용이하게 하고 각 방들을 연결하고 있다. 방들은 각각 칸마다 쌍여닫이문을 달았고, 위쪽으로 위치해 있는 굴뚝의 모양이 아름답다. 동재에는 응도재(凝道齋), 서재에는 양호재(養浩齋)의 현판이 걸려 있다.

◇기타
사당의 좌측에 위치한 전사청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좌측부터 ‘마루-방-마루’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각 실들은 쌍여닫이문, 외여닫이문, 쌍여닫이문으로 출입문을 내었다.
외삼문은 앞에 여러 개의 계단을 올라 진입하도록 되어 있는데, 1칸의 사주문으로 입도문(入道門)이란 현판을 달았다. 내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으로 단청을 하였다. 내삼문 옆의 향나무가 서원의 역사를 보여주듯이 서 있다.

□배향인물

·김성일 (金誠一, 1538년~1593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순절하였다. 1590년 일본에 통신사 부사로 갔다 와서 일본이 침략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여 보고함으로써 임진왜란 발발 이후 큰 비판을 받았다.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특히 학봉 문중에서는 학봉이 남긴 "3년 동안 금부도사가 찾아오지 않으면 선비 집안이 아니다."라는 말을 가훈으로 여겨 왕에게 직언을 하는 문중으로 영남 유림의 중심 문중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었을 때 그는 광국 원종공신 1등의 한 사람으로 특별히 책록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진주성 전투에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병사한 공로로 사후에는 선무 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다.

◇ 학봉(鶴峰)김성일 생애
할아버지는 김예범이고, 아버지는 김진(金璡)이며 어머니는 민세경(閔世卿)의 딸 여흥민 씨이며, 그는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 망계(望溪) 김만근(金萬謹)이 안동으로 이사와 정착했으며, 할아버지 김예범은 병절교위를 지내고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지만 아버지 김진은 관직이 없었다. 아버지 김진은 1592년(선조 25) 김성일이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면서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종계변무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1579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1579년 함경도순무어사가 되어 영흥·함흥·삼수·길주·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나주 목사가 되어 도내의 민폐를 해결하였다. 당시 김여물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9년 의정부 사인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겐소(玄蘇)·소 요시토시(宗義智)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였고, 1589년 11월 18일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조선통신사 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1590년 3월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간파쿠(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0년 일본에 갔던 통신사 일행이 이듬해 돌아와 한 보고는 서로 상반된 것이었다. 각처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무사들을 정리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선조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정탐을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조선에서 정탐꾼이 파견된다는 보고를 듣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경계와 검문을 강화하자 선조는 공식적인 사절단을 파견한 것이었다.
이때 통신사 중 정사는 서인인 황윤길이었고 부사는 동인인 김성일이었다. 1591년 음력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또 풍신수길의 인상을 묻는 선조의 질문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의 눈은 쥐와 같아 마땅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이러한 상반된 보고에 당시 재상 류성룡은 같은 동인인 김성일의 편을 들었으며, 이에 선조는 김성일의 보고를 채택하였다. 일단 당파심에 김성일의 편은 들었으나, 이후의 결과가 두려워진 류성룡은 어전보고가 끝난 후 김성일 따로 만나 묻길,"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후일 병화가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김성일은 다음과 같은 말로 무마하였다.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김성일의 보고에 서인 황윤길을 비롯해, 조헌 등이 기필코 왜적이 침입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서인(西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라고 매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당시 김성일, 류성룡 등 동인이 정국 주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성일은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 일대가 일본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 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었다. 퇴계 이황의 학문적 적통을 이어받은 수제자로서 왕실의 권력이나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백성을 위한 직언을 하기로 유명하여 경상도의 흩어진 민심을 모으기에는 가장 적합하다는 류성룡 등의 천거에 의해 선조의 사형 명령이 철회되고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된 것이다.
이후 즉시 경상도로 내려가 격문을 지어 흩어진 백성을 불러 모으는 한편, 이미 어지러워진 군율을 바로 세우는 데에 몰두한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뿌리고 군량으로 쓸 양곡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 조정에서 곽재우를 처벌하려는 기색이 있자, 양자를 화해시켜 이를 원만히 수습하기도 하였다.
김성일은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김시민 장군은 당시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서, 진주 목사와 산에 숨어 있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의 명으로 목사직을 대리하여 진주성을 지키게 되었다. 초유사는 당시 곡창지대였던 호남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왜군이 반드시 경상도에서 호남으로 넘어가기 위해 진주성을 침략할 것임을 내다보고 진주성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관군과 의병이 함께 진주성을 지키도록 해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1차 진주성 전투)을 진두지휘했다. 이후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병사했다. 병사하는 순간까지도 나라의 운명과 붕당의 폐단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사후 1604년(선조 34) 선무 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다. 그에 따라 1592년 이조참판 겸 동지에 추증되었던 아버지 김진은 다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의금부 지사에 가증되었다.
1606년(선조 38)에는 학봉 본인에게 증 가선대부 이조 참판 겸 홍문관 제학에 추증되었고, 1607년(선조 39)에는 임하현에 그를 모신 임천향사가 세워졌다. 임천향사는 1618년(광해군 10) 사액을 받고 임천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를 모신 사당은 존현사(尊賢祠)라는 현판을 받았다. 1676년(숙종 2)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에 가증되었고, 1679년(숙종 5) 문충(文忠)의 증시가 추서되었다.
1619(광해군 11년) 묘비석이 세워졌으며 한강 정구가 찬하였다. 1664년(현종 5)에는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가 신도비문을 지었다.

□김성일과 후손의 일화

◇ 학봉 김성일에게는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579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심지어 선조에게도 직설적으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 선조가 하루는 "내가 중국사로 치자면 어느 왕과 맞먹을까?" 라고 자화자찬을 하며 넌지시 중국 역대 명군과 비슷하지 않느냐고 하자 김성일은 주저없이 “학문에서는 명군인 요왕과 같으나 정치로 보자면 폭군인 주왕 같사옵니다.”
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선조는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다른 대신들이 “그래도 요왕과 같이 잘하시는 게 있사오니 그 쪽으로 신경 써달라는 충언입니다.”고 아첨하며 분노를 잠재웠다고 한다.

◇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일화가 전한다. 광주 무등산의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1533∼1592년)은 아들 셋 가운데, 두 아들을 전쟁터로 데려가서, 삼부자가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셋째아들인 용후(用厚, 당시 16세)만큼은 안동의 김성일 집안으로 보내 대를 잇도록 했다. 이때 고경명의 셋째아들을 비롯한 고씨 가족 50여 명을 받아들여 수년간 보살펴준 사람이 그의 부인과 아들들이다. 전란이란 각박한 시절인데도 두 가족은 피를 나눈 형제처럼 동고동락하였던 아름다운 이야기다.

◇ 안동 학봉종택에 자식 대까지 내려오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학봉 김성일은 퇴계 학통을 이어받은 제1대 제자다. 그의 11대 종손 김흥락(金興洛, 1827∼1899) 역시 제8대 퇴계 정맥을 잇는 영광을 얻는다.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 학봉의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1946)은 평생 안동 일대에서 유명한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소문이 났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종택에 대대로 내려오던 전 재산 전답 700두락 18만평[현재 시가 200억원]을 비밀리에 모두 독립군자금으로 보낸다. 그러다보니 말년에는 종가 살림이 거의 거덜 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동딸 김후웅 여사가, 1995년 아버지가 생전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게 되자‘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제목의 서간문을 남겼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 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중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찌할꼬.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 값 그것마저 다 바치셨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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