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미 소리마당 국정국악원장

열여덟 곱디 고운 나이에 창녕 대합면 퇴산리 162번지로 시집와서 종가 맏며느리로 한평생을 보내고 팔순이 훌쩍 넘어 허리 수술을 하고서야 자리에 앉으신 우리 엄마, 일 잘하기로 대합면이 다 알고, 할아버지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시던 집안의 대들보 맏며느리였다.

친정아버님은 삼촌이 나이어려 돌아가셔서 어쩔 수 없이 4남매 장남으로 생계를 책임지고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다. 그러니 집안 큰살림은 저절로 친정어머님 차지가 되었고, 엄하고 까다로운 할아버지와 마음 좋은 우리 할머니, 집안일은 거의 모르고 살았던 아버지, 집안에 일꾼들까지…. 속이 다 썩을 대로 썩어가며 개인생활은 전혀 엄두도 못 내고 평생을 사셨다.

어릴 적 우리엄마는 모든 일에 만능이셨다. 들일은 일꾼보다 더 많이 앞서서 했고, 집안 대소사는 농담 섞어가며 설렁설렁 사람들 얼굴에 절로 웃음이 나게 하면서 지혜롭게 헤쳐 나가셨다. 어머니가 시집오기 전 까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친척들도 지금은 그 자손들까지 명절이면 친정집에 다 모여 화기애애 이야기꽃을 피우며 어머니께서 장만하신 음식을 서로 싸 가기 바쁘다. 일이면 일! 음식이면 음식! 사람관계까지 척척 두루두루 만사형통이었지만 단 하루도 어머니만의 날이 없었다.

재작년 허리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서야 자리에 앉을 시간이 생겼다. 평생 베푸는 것에 익숙했던 엄마는 받는 것에 익숙하지 못해 한동안 친정아버님을 달달 볶으셨다. 지난 힘들었던 한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가족 모두 비상이 걸려 갈 때 마다 힘들었다. 평생 참고 혼자서 견뎌온 휴유증인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정신과 약처방을 받아 억지로 화를 재울 수 있었다.

허리를 다치고 얻은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담배를 끊은 것이다. 첫 임신 때 입덧이 너무 심해서 할머니가 담배를 피우라고 하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지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입덧을 담배로 치료한 우리 4남매가 아직까지 멀쩡한 것을 보면 그 당시는 공기가 좋아서인지, 아무튼 말도 안 되는 일이 그 당시는 통했다. 그래서인지 언니랑 나 말고 오빠와 남동생은 술은 입에도 못 대도 담배 애호가이다.

이번 명절에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생겼다. 친정어머님 입에서 노래가 자동으로 나오는 것이다. 담배를 끊은 지 2년 쯤 되었는데 처녀 적 불렀던 노래의 가사 하나 까먹지도 않고 줄줄 부르는 것이다. 옛날 회심가를 부르시는데 깜짝 놀라서 얼른 녹음부터 했다. 내가 갈 때 마다 민요를 불러드리면 ‘나도 옛날에 모르는 노래가 없었지’ 하면서도 부르지 않아서 무심히 들었다. 또 담배 때문에 목이 탁해서 부르지도 못하셨다. 그런데 담배를 끊고 몇 년 만에 그냥 이야기하다가도 ‘너냥 나냥 두리둥실…' 너영나영 이라는 곡을 생생히 부르고 모심기노래, 청춘가, 노랫가락. 그리고 제목도 모르는 옛날 농요까지 부르시는데 곡태가 정겨웠다.

세상에나 놀라웠다. 어디 있다 이제야 나왔는지…. 몇 년 전 만해도 숨이 차서 말도 크게 못 했는데 꼭꼭 숨어있던 노래가 굽이굽이 페인 목주름을 타고 이제야 흘러나왔다. 모진 세월 견디고 온갖 사연을 담아 술술 나오는 친정어머님의 노래가 너무도 신기해서 연신 동영상에 담았다. 한 번도 어머니 노래를 들어 본적이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계산해 보니 약67년 전 열여섯 열입곱 그때 부르던 노래라고 한다. 모심기노래를 부르면서 서로 엄마 옆에서 모를 심겠다고 경쟁을 했다고 한다. 그동안 삶이 하도 바빠서 노래 한번 부를 수없이 칠팔십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젊은 시절에는 종갓집 대농 살림살이와 타지로 발령받은 아버지와 자식들 뒷바라지로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세월 속에서 노래를 잊어버리고 살았다. 나이가 들어서는 담배로 잦은 기침 때문에 노래는 엄두도 못 내다가 팔순이 훌쩍 넘어 고장 난 허리 덕에 담배를 딱 끊고 다시 18세 순이로 돌아와 흥얼 흥얼…. 보기도 좋고 듣기도 좋다. 나의 가야금반주에 멈추거니 부르거니 하면서 손뼉을 치며 좋아하신다.

우리 엄마는 내가 봐도 참으로 훈장을 받을만한 어른이시다. 물끄러미 쳐다보시는 우리 친정 아버님 옛날 생각이 나셨는지 주섬주섬 낡은 봉투하나를 꺼내셨다. 누렇게 탈색된 표창장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2세 교육을 통하여 국가 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 표창이었는데 대통령 표창부터 장관상이며 각종 기관 표창이 낡은 봉투에 두툼하게 들어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이런 분이었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자랑스러웠다. 한번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평생 묵묵히 그 자리에서 맡은바 책임을 다 하시는 부모님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명절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운전을 하고 남편은 연신 아픈 내 어깨를 문지르면서 편안한 잠 속에서 포항에 도착하였다. 이 순간까지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는 걸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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