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근성서원(芹城書院)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남안동IC로 가다보면 조탑리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그 길을 계속 따라 가다보면 밭 한 가운데 덩그라니 홀로 서있는 탑 하나를 보게 된다. 안동 조탑동 5층 전탑(보물 제57호)이다. 이 탑은 돌로 만든 기단 위에 벽돌로 쌓은 탑신을 얹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기단부 정면에는 감실이 있고, 감실 좌우에는 인왕상을 조각해 놓았다. 상륜부 전체가 결실되어 있고 탑의 높이는 8.65m이다. 5층 석탑에서 우측으로 보면 산중턱에 보이는 서원이 근성서원으로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36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조탑리는 고려말에는 일직현에 속했고 1300여 년 전 통일신라시대 고창군 남단 표지로 7층전탑을 세웠다 하여 조탑리로 불리고 있다.

◇연혁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 있는 서원이다. 1812년(순조 12년) 의성군(義城郡) 안평면(安平面) 하영리(河寧里)에 조선 개국공신인 익화군(益和君) 의암 김인찬(金仁贊)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곡서원으로 창건하였고, 비안면(比安面)으로 이건했다가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뒤 1926년 현 위치로 복설, 근성(芹城)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은 의암 김인찬(金仁贊)과 익성군((益城君) 김이갱을 종향(從享)하여 매년 3월과 9월 초정(초정)에 향사했으나, 근년에는 4월 10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구조
서원의 경내는 매우 경사지여서 강당과 사당 사이의 고저차가 매우 많이 난다. 구성은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당이 전면으로 보이고, 강당 뒤쪽으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사당영역에 이른다. 사당영역의 담장 밖 우측에 전사청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서재는 따로 없다.

◇사당
원훈사(元勳祠)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측면에는 풍혈판을 달았다. 처마는 겹처마로 꾸미고 집에는 단청을 하였다. 각각의 칸에는 쌍여닫이문으로 출입문을 내었다.

◇강당
숭의당(崇義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중앙의 2칸에 마루를 들이고 전면은 문을 달지 않고 완전히 개방하였으며 후면으로는 쌍여닫이판문을 내었다. 마루의 좌우에는 통칸의 방이 대칭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마루에서 방으로 각각의 칸마다 외여닫이문이 달려있다. 방의 전면으로는 쌍여닫이창을 만들고 아래에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전열 기둥 중 중앙의 하나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우측 방 입구 위에 양직재(養直齋)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기타
사당의 우측에 위치한 전사청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우측에는 방을 들이고 좌측은 전면을 개방하고 흙으로 마감을 하였다. 방 쪽으로 작은 쪽마루를 붙이고 방으로 출입할 수 있는 외여닫이문도 달았다. 외삼문은 1칸의 사주문으로 간소하게 만들었고, 내삼문은 3칸 평대문에 단청을 하였다. 강당과 사당 사이에 오래된 백일홍이 보인다.

□배향인물

·김인찬 (金仁贊, 1336∼1392)
고려 말·조선 초의 무신. 양근 김씨(楊根金氏)의 시조. 자는 의지(義之). 호는 의암(毅庵). 시호는 충민(忠愍). 1376년(우왕 2년) 북청천호(北靑千戶)가 되고, 1383년 이성계(李成桂)의 부하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년)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이성계와 같이 위화도에서 회군했으며, 1392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다. 조선개국의 공으로 보조공신중추원사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익화군·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태조의 친병(親兵)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곧 죽었다. 사후에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의 증직이 되고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예장(禮葬)을 하게 하였다. 일직 근성서원에 제향되었다.

·김이갱(1399(정종 1년)∼1457년(세조 3년)
본관은 양근(楊根)이며, 자(字)는 원문(遠聞)이다.
김효충(金孝忠)의 맏아들로 김인찬의 현손(玄孫)이며, 음보(陰補)로 성종조(成宗朝)에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冊錄)되고 호조참판(戶曺參判)을 지냈다. 익성군(益城君)에 습봉(襲封)되었으며 근성서원(芹城書院)에 제향(祭享)한다.

□이성계와 김인찬 일화
1383년 9월, 고려의 장수였던 이성계는 느긋한 기분으로 동북면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이성계 자신의 세력 기반이었던 동북면을 침공하여 이성계를 근심시켰던 여진족 호바투를 전투에서 패배시키고 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성계는 돌아가는 길에 잠시 안변(安邊)에 들렀다. 안변의 뽕나무가 심어진 땅을 지나던 이성계는 우연히 비둘기 두 마리를 보게 되었다.
승전을 거두고 오니 기분이 한껏 업 되었을까? 이성계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심심풀이로 비둘기에 화살을 날렸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기록이지만 이성계는 나란히 앉아있던 비둘기 두 마리를 동시에 잡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자신의 화살 실력을 이성계가 확인하고 있을 때, 근처의 밭에서 김을 매던 두 사람은 환호성을 질렀다.
"야, 거기 도령! 참 화살 한 번 기가 막히게 쏩니다 그려."
군대를 이끌고 외적을 토벌하며 위세를 떨치던 장군에게 시골의 김매는 농부들이 "도령" 하면서 말을 걸었는데, 이 당시 이성계의 나이는 48세로 거의 50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도령 소리를 들은 이성계는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이미 도령 소리 들을 나이는 지났네, 이 사람들아."
그래도 젊다는 소리를 해주니 기분은 좋았는지 이성계는 휘하 병사들에게 시켜 자신이 잡은 비둘기를 그 두 사람에게 나눠주도록 했다. 알아서 잡아먹으라는 것이다. 그런 뒤 떠나려는 이성계였는데, 잠시 후에 그 농부 두 사람은 이성계를 찾아왔다.
"뭐 하러 왔소?"
"장군이 우리에게 비둘기를 주셔서, 우리도 대접을 하려고 하는데, 대접 하려고 해도 이런 거 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좀 드시구랴."
이성계가 두 사람이 바친 것을 가만히 보니 맨 좁쌀로 지은 좁쌀밥이었다. 개경에 가면 조정 실력자로서의 지위가 있고 동북면에 가면 수천의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이성계에게 이런 밥이야 입맛 버리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농부들이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가져온 밥인데 안 먹는다고 하기도 좀 그랬다.
그래서 이성계는 그 자리에서 좁쌀밥을 후루룩 한 입에 집어넣었다. "야, 잘 먹었소." 그렇게 되어 이번에는 진짜로 떠나려는 이성계 였는데….
"왜 안가고 따라오기요?"
"그냥 장군 따라갈 랍니다."
농부 두 사람은 이성계가 마음에 들었는지 혹은 이쪽 따라가면 출셋길이 열릴 것이라 여겼는지 이성계 옆을 떠나려고 하지를 않은 것이다. 막무가내로 따라오는 수준이었지만 이성계도 두 사람을 말리지 않았다.
"알았구랴."
그렇게 되어 이성계를 따라온, 밭에서 김매던 두 농부의 이름은 각각 김인찬(金仁贊), 한충(韓忠)으로 모두 조선왕조의 개국 공신이 되었다.
그 중 김인찬은 조선 개국 후 이성계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