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냉기를 하얀빛으로 결빙시키는 겨울 한 낮. 창가에 앉아 점점이 날리는 하얀 눈을 본다. 떨어지는 눈송이 하나하나에 가느다란 지난 기억의 줄들을 지워 내며 한 순간 고즈넉한 망념에 젖는다. 일순 흐린 현실에 노곤하던 삶의 근골이 느슨해진다.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않는 블루스음악이 잔잔히 다가와 옆자리에 앉는다. 카페 안을 가득 채운 커피 향은 겨울나무 속살을 더듬듯 소멸해 가는 내 기억을 더듬는다. 저 멀리 치열하게 한 생을 마무리하고 홀로 서 있는 겨울나무의 뒷모습을 내려다본다.

눈발에 뒤척이는 거리는 물도, 땅도, 바람도 서로 물 흐르듯 공존하고 있다. 무관심도 아니고, 간섭도 아니고, 격절도 아닌 채로. 한 사람의 가난한 독기를 품고 오직 봄을 향한 일념 하나로 나직이 노래하고 있는 칼바람 앞에서의 겨울나무처럼.

실내는 어느새 블루스가 간 자리에 재즈가 와 앉았다. 어릴 때 평상 위에서 푸성귀를 다듬으며 흥얼거리던 할머니의 그 음률 그 가락의 여운 같은 블루스. 팔다리 욱신거리는 신음과 짓이겨진 마음을 허공에 띄워 허하게 뱉는 한숨소리 같은 재즈. 모두가 오직 마음속으로만 비명을 지르듯 부르는 겨울나무의 탄식과도 비슷한 소리다. 눈 내리는 강가에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나는 참을 수 없이 힘들고 아프다’고. 이 겨울 더 춥고, 더 외로운 존재들이 외치는 마음의 신음소리를 대신 들려주는 것 같다.

입춘첩(立春帖)을 붙인지 여러 날 지났건만 남은 추위의 기세가 만만찮다. 봄의 기운이 쉬이 겨울의 음기를 물리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양이다. 봄을 짝사랑하는 여름에게 오랫동안 따뜻하게 품어 온 겨울이 봄을 쉽게 내놓을 것 같지도 않다. 겨울 끝자락에 봄을 기다리는 시간은 위압감도 막막함도 없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뭔가 만들어지기 직전 열이 오르고 스스로의 분명한 정체를 드러내 과시하려는 듯한 어슴푸레한 공명 같은 시간 같기도 하다. 마치 채워지기 이전이거나 채워져 있다가 비워진 공간처럼 허허로워 공간인 동시에 대상이고 대상인 동시에 허방 같기도 하다.

그 허방인 겨울의 끝자락이 녹록치 않다. 모두가 가난과 배고픔에 지지 않는 어떤 특별한 순간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둣한 시간이다. 겨울눈을 듬뿍 키우며 다가올 화려한 봄을 꿈꾸는 겨울나무처럼 들리지 않는 곤고(困苦)한 노래를 부르며 봄을 기다리고 있다.

깊은 겨울 숲에 든 적이 있었다. 하얗게 반짝이는 순백의 자작나무 숲이었다. 눈 덮인 하얀 숲에서 껍질이라는 옷을 두껍게 걸치기도, 얇은 옷을 겹겹이 입고 찬바람에 긁히듯 씻긴 부드러운 하얀 수피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까마귀가 순백의 나뭇가지에 오롯하게 홀로 먼 곳을 응시하며 울고 있었다. 마치 삭풍을 맞는 하얀 나신들의 아픔을 대신하듯 차갑게 냉각된 슬픔 같은 소리였다. 고독이 하도 깊어 외려 독보적인 공격성까지 겸비한 듯 들렸다. 또렷하고 진하게 우려낸 슬픔의 응결체의 끝이거나 시작을 알리는 겨울나무의 속울음 같기도 했다. 한기 가득한 겨울의 나목과 새카만 듯 창백한 계면조(界面調)의 수리성에 가까운 까마귀의 울음소리. 여느 새 울음소리와 다르게 맑지도 청아하지도 않았지만 우렁찼다. 중저음으로 목젖을 긁어 대는 탁음이었지만 신비했다. 녹녹치 않는 겨울 삶을 이어가는 이들을 대신해 부르는 겨울나무의 노래에 까마귀가 함께하고 있었다.

재즈가 간 카페는 뽕짝이 메웠다. 흥겨우면서도 서글픈 가락이다. 목울대를 부드럽게 비틀어야만 가능해지는 소위 꺾기 창법의 진수 곡이다. 무명실을 꼬아 만든 열두 줄 가야금의 울림처럼 청아한 듯 둔탁하고 어두운 듯 상쾌하다. 바람에 절로 목울대가 비틀려 내지르는 난분분한 음률이다. 겨울나무의 긴 한숨 같은 휘파람을 닮았다.

풀풀 날리던 눈이 쏟아진 거리는 어느새 하얀 눈 세상이다. 배배틀며 춤추듯 내리는 눈송이가 뽕짝 리듬에 경쾌하다. 차가운 눈이지만 왠지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마음이 새하얗게 설렌다.

겨울나무의 노래는 겨울의 긴 터널을 지나는 이들을 향한 절절한 삶의 노래다. 시린 생(生)을 살아가는 이들을 대신해 부르는 노래다. 나뭇가지의 겨울눈들이 종교처럼 봄을 믿고 있듯이 언 대지에도 살아있는 것들은 살아서 눈 뜰 것이라며 속삭이듯 부른다. 치열하게 한 세상 사는 건 식물이나 사람이나 다르지 않다. 겨울에도 언 땅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나이테를 한 켜 더 두르며 다가올 봄을 쉬지 않고 준비하고 있는 겨울나무. 치열하지 않고서는 결코 아름다운 삶을 만들 수 없다. 생존의 조건이다. 나무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도 단순히 꽃과 열매를 맺기 때문이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블루스, 재즈, 뽕짝이 간 자리에 겨울나무의 다음 노래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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