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 … 청성서원(靑城書院)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에 자리하고 있다. 안동시 서후면 솟밤다리에서 송야천을 따라 좌회전해서 가다보면 청성산 동쪽에 우뚝하니 자리한 서원이 보인다. 권호문이 살던 청성산 기슭에 서원을 지어 청성서원이라 하였다.

◇연혁
경북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159번지에 있는 서원이다. 1608년(선조 41년) 권호문(權好文)의 문하인 용만(龍巒) 권기(權紀)를 위시한 사람들의 발의로 권호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지금의 연허헌(鳶魚軒) 뒤편에 서원을 세워 1612년(광해군 4년) 위패를 봉안했다. 1768년(영조 44년) 현 위치로 이건했으나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9년 복설하여 2월과 8월 하정(下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문화재자료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조
서원은 강당 영역과 사당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강당 영역에는 동서재가 마주하고 있다.◇사당따로 독립되어 있는 사당 영역은 내삼문을 통해 들어서면 청풍사(淸風詞)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정면에 위치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으로 높게 기단을 쌓아 앉혀져 있다. 각각의 칸마다 쌍여닫이판문을 달았으며, 문의 윗부분에는 살을 넣어 꾸몄다.

◇강당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으로 전후퇴집 형식을 취하고 있다. 중앙의 3칸을 마루로 꾸몄는데 전면에는 삼분합 들어열개문을 달고 후면에는 쌍여닫이문으로 하였다. 마루의 좌우에는 한 칸 반 크기의 방이 대칭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건물의 전면과 측면을 툇마루로 둘렀다. 방의 전면으로는 쌍여닫이문을 내고, 마루에서는 각각의 방마다 두 개씩의 문을 달았다. 강당의 전면에는 백일홍을 심어 서원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동재·서재외삼문인 정도문(正道門)을 들어서면 좌우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인 동서재가 위치하고 있다. 강당 쪽으로 한 칸은 마루방으로 꾸미고, 아래 두 칸은 온돌방이다. 방의 전면에만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방출입문은 아래의 것은 쌍여닫이로 위에는 외여닫이로 차이를 두었다. 마루방은 판문으로 되어 있어 생활공간이기 보다는 저장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재는 의방재(義方齋), 서재는 경직재(敬直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축물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로는 청풍사(淸風祠)·중정당(重正堂)·동재·서재·정도문(正道門)·전사청·내삼문·주소(廚所) 등이 있다. 청풍사는 향사(享祀)를 지내는 3칸 규모의 사우(祠宇)로 권호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정당은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 회합 및 학문 토론 장소인 8칸 규모의 강당으로 중앙은 마루로 되어 있고, 좌우측은 협실(夾室)로 되어 있다.
동재와 서재는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각 3칸 규모의 건물이며, 주소는 고지기가 거처하는 6칸 규모의 건물이다.

◇기타
경내에는 현판(正道門, 仁智堂, 義方齋, 敬直齋, 淸風祠)이 있다. 서원 내 보관된 송암문집 목각판은 현재 안동시 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있다. 연어헌은 막곡리 남쪽 낙동강변에 있으며, 종택인 만물당은 서후면 교리에 있다.

■배향인물

◇권호문(權好文, 1532~1587)
송암 권호문 선생은 복야공(僕射公) 11世孫으로 윤평계(允平系) 중랑장 후(厚)의 현손 육의 둘째아들로 1532년 출생하였다. 공은 이퇴계(李退溪)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동료의 추앙을 받았다. 조선 중기의 문인·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 안주교수(安州敎授) 규의 아들이다. 1549년(명종 4) 아버지를 여의고 1561년 30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564년에 어머니상을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 아래에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다.
이황(李滉)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같은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이들로부터 학행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만년에 덕망이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다.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56세로 일생을 마쳤으며, 묘지는 안동부 서쪽 마감산(麻甘山)에 있다.
안동의 송암서원(松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그는 평생을 자연에 묻혀 살았는데, 이황은 그를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고 하였고, 벗 유성룡도 강호고사(江湖高士)라 하였다. 저서로는 ≪송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경기체가의 변형형식인 <독락팔곡 獨樂八曲>과 연시조인 <한거십팔곡 閑居十八曲>이 ≪송암집≫에 전한다.

◇시대상황(時代狀況)
서기 1500년대는 사림(士林)에게는 시련과 영광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무오사화, 갑자사화이후 중종(中宗)반정으로 사림의 뜻을 펴는가 했더니 간신들에 의한 기묘사화가 있었고 을사사화(乙巳士禍)로 간신들 싸움에 사림들은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은 다시 힘을 얻어 정계를 장악하지만 명분과 실리에 따라 동서로 분당된다.
이러한 난세에 선비들은 세 가지 행로를 걷는다. 하나는 수기치인(修己治人) 과 입신양명(立身揚名)으로 정치일선에 나서는 선비들이고, 둘은 초야(草野)에서 덕을 닦으며 후진양성에 몰두하는 선비들이고, 셋은 초야에 묻혀 있다가 천거되어 정치에 나서는 선비들이다. 퇴계의 제자들 중 서애 유성룡 등은 첫 번째 부류이고 송암 권호문은 두 번째 경우다. 송암 선생은 일찍이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서 오직 후학들 가르침에 힘썼으니 유성룡은 선생을 “백세사(百世師)”라고 평한 바 있다.

■ 송암과‘靑城山’
“오래 이별하면 늘 꿈속에 들어오고, 정이 붙어 정말 잠시도 떨어질 수 없도다”송암은 고향의 산인 청성산(靑城山)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청성산은 낙동강이 바로 앞을 지나가는, 높지 않은 산(252m)이다.
그가 지은 성산기(城山記)의 마지막 부분이다.
“내가 더벅머리 시절부터 책상을 지고 오르내린 것이 일 년에 두세 번이었다. 이 산을 사랑한 것이 미녀 서시(西施) 이상이었다. 오래 이별하면 늘 꿈속에 들어오고, 와서 찾게 되면 늘 그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정이 붙어 정말 잠시도 떨어질 수 없었다. 푸른 절벽에 초가를 지어 허망한 반평생을 보낼 곳으로 삼고자 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과거시험에 빠져 오래 몸을 빼내지 못했다.〃
시를 통해서도 청성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성산을 사랑함이 가인을 사랑함과 같구나(愛城山似愛佳人)/ 참모습과 깊은 정이 비 그치자 새롭도다(眞態濃情雨後新)/ 헤어져 십리길 와서 하룻밤 지났는데(十里別來經一夜)/ 두어 봉우리 푸르게 꿈에 자꾸 나타나네(數峯靑繞夢魂頻)//
송암은 모친상을 마친 1566년 관물당을 떠나 아예 청성산으로 들어가 살고자 했다. 그래서 낙동강변 청성산 기슭에 연어헌(鳶魚軒)을 지었다. 연어는 시경에 나오는 ‘연비어약(鳶飛魚躍·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뜀)’에서 따온 말로, ‘만물이 우주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비유해 표현한 것이다.
그는 1573년에는 또 청성산에 청성정사를 지어 후학을 지도하며 유유자적하다 세상을 하직한다. 죽은 후에는 청성산에 묻혔고, 그리고 후일 묘 아래 건립된 청성서원에 그의 위패가 봉안됐다.
송암의 벗인 학봉 김성일이 송암 영전에 올린 제문 중 일부다.
‘나의 벗 청성산의 혼령이여/ 빈 배 같은 신세였고/ 늙은 학 같은 신세였지/ 바람과 달 같은 마음이었고/ 강호에서 살아야 할 성품이었지/ 그 지조는 옥과 같이 곧고 곧았고/ 그 모습은 난과 같이 아름다웠지/…그 무엇이 그대를 즐겁게 했나/ 사방 벽에 놓여있는 책들이었지/ 어디에다 그대 흥취 붙였나/ 시 읊고 술 마시는 두 가지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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