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기양서원(岐陽書院)

안동에서 출발해 영덕 방향으로 가다가 임동면 소재지 조금 못 미쳐 수곡교를 건너면 전주류씨무실종택과 수애당을 지나 기양서당을 만날 수 있다.

임하호가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기양서당은 마치 글 읽는 소리가 들릴 듯 조용하고 잔잔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안동에는 안동댐과 임하댐, 두 개의 댐이 있는데 이 때문에 수많은 문화재들이 이건 되었다. 기양서당도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져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조용하면서도 잔잔한 임하호가 한 눈에 보이는 기양서당은 나름의 멋과 풍광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서당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 언덕에 자리 잡은 은행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수많은 나뭇잎과 가지들이 어우러져 기양서당이 세워진 후의 오랜 시간을 견뎌온 듯하다. 기양서당에 앉으면 시간이 멈춘 듯하며, 구름이 그대로 비친 임하호를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인다.

기양서당은 현재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인 류필기 씨가 고택체험을 운영 중에 있다. 고택에서 다양한 세미나를 유치하고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노력으로 많은 이들에게 기양서당의 매력을 느끼게 하고 있다.

◇연혁
경북 안동시 일직면 수곡리 537-1번지에 있는 서원이다. 1615년(광해군 7년)에 서재를 서당으로 중창하였고, 서당 뒤의 사당인 추원사(追遠祠)는 기봉 유복기(岐峯 柳復起)의 5대손인 유원현(柳元鉉)이 지었으며, 후손들에 의해 춘추향사를 거행하게 되어 순수한 서당에서 서원적인 형태로 접근하였다.
원래는 임동면 수곡동에 있었으나 1988년 임하댐 건설로 그곳이 수몰됨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1979년 경북민속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유복기(岐峯 柳復起) 선생과 유의손(會軒 柳義孫)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 하는 곳으로, 매년 3월과 9월 초정(初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구조
경내에는 강당, 사당, 전사청이 자리하고 있으며, 지형에 의해 사당이 있는 곳이 높게 조성되어 있다. 정문은 사주문이고 강당은 5×2칸이다. 강당전정에는 요대석 1기가 있으며 정문 내 처마에는 북이 매달려 있어 서당 내 시간과 규칙 및 유사 시에 치도록 되어 있다.

별문 남문밖에는 전사청이 있으므로 서당은 모두 4동의 건물로 구성되었다. 강당은 전체 5×2칸 중에 가운데 6칸이 대칭이며 양단이 각 2칸통의 긴 온돌방이다. 수직사는 온전한 口자형민가로서 정당은 소박한 홑집이다. 대청은 중3칸, 양단은 각기 2칸통의 온돌방인데 안방과 사랑방(건넌방)이다.

두 방의 천장에 반자 없이 서까래와 양벽이 그대로 노출앙시되는 연등천정식이며 안방 연등의 서까래에는 장몸을 새끼로 묶어 횡가하여 메주를 달아매는 등 선반이나 시렁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시렁법은 좀체로 있기 어려운 것으로서 원초적가구법을 보이는 예라 하겠다.

◇강당
역락당(亦樂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상부의 가구는 5량구조이다. 중앙의 3칸을 마루로 만들고 전면은 문을 달아 개방하였으며, 후면에는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마루의 좌우에는 통칸으로 된 온돌방이 마주보고 연결되어 있으며, 방들은 마당을 향해서 쌍여닫이창을 내었다. 마루에서 방으로의 출입문은 앞쪽은 쌍여닫이로 하고 뒤쪽은 외여닫이문으로 꾸몄다. 방에서 측면으로도 문을 내었는데 우측의 방은 외여닫이문과 창으로 하였고, 좌측의 방은 각각 칸에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후면의 모습이 두 방이 차이를 보이는데 우측 방은 외여닫이문을 내고, 좌측방은 벽장을 달아내었다. 건물의 앞마당에 불을 밝히는 정료대를 놓았다. 강당영역으로의 진입이 측면에서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 특이한 부분이다.

◇전사청
사당영역으로 들어가는 협문과 직각으로 배치되어 있는 전사청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지붕의 합각면을 정면으로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입구에는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추원재(追遠齋)
사당인 추원재(追遠齋)는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강당 건물인 역락당(亦樂堂)은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이며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경관이 좋은 데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로 전주 유씨 집안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배향인물

·유의손(柳義孫, 1398~1450)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효숙(孝叔), 호는 회헌(檜軒) 또는 농암(聾巖). 습(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극서(克恕)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빈(濱)이며, 어머니는 윤방익(尹邦益)의 딸이다.
1419년(세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였다. 그 뒤 검열을 거쳐, 감찰·수찬을 역임하였다. 1436년에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곧 직제학에 올랐다. 동부승지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그는 학문에도 능하였다.
1447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에 동반직(東班職)에 있던 우부승지 김유양(金有讓)의 아들을 잘못 서반직(西班職)에 옮겨놓은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예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그때 상을 당함으로써 몸이 쇠약해져 관직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세종이 고기를 하사하여 보신을 시켰으나 끝내 병으로 사직하고 말았다. 그는 문장에 능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회헌일고≫가 있다.

·유복기(柳復起, 1555~1617)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서(聖瑞), 호는 기봉(岐峯). 안동출신. 할아버지는 인의(引儀) 윤선(潤善)이다. 외숙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정구(鄭逑)와 더불어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때 김해(金垓)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예천 등지에서 싸웠으며, 특히 아들 5명과 함게 전투에 참가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곽재우(郭再祐)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다. 전란이 끝난 뒤에는 굶주려 방랑하는 백성들을 진휼하는 데 힘썼다. 벼슬이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이르렀다. 세고(世稿)가 전하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유의손‘집현전 3선생’으로 불리다

유의손은 1398(태조 7년)에 태어나서 1450년(세종 20년)에 숨을 거두었다. 조부는 유극서(柳克恕)인데 보문관직제학으로서 지제교에 이조참의로 증직되고, 아버지는 유빈(柳濱)으로 태종과 생원시에 동방해서 생원시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어머니는 덕산윤씨이다.
1419년(세종 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6년(세종 8년)에 전책을 올려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집현전에 뽑혔으며, 곧바로 직제학이 되어 남수문, 권채와 함께 문장과 덕행으로 ’집현전 3선생‘이라 일컬어졌다.
1447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동반직에 있던 우부승지 김유양의 아들을 잘못 서반직에 옮겨 놓은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 예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당시 상을 당하여 몸이 쇠약해져 관직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세종이 고기를 하사하여 보신을 시켰으나 끝내 병으로 사직하였다.

□유복기(柳復起)의 별급문기(別給文記):1600~1617년

별급문기(別給文記)는 17세기 초에 유복기(柳復起)로 추정되는 조부가 손자에게 노비를 별급한 별급문기와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준 분재기다.
이 문서는 조부가 손자에게 노비를 별급한 분재기로서 작성연대도 없고, 중간에 상당부분이 멸실되어 있어 정확한 내용파악은 어렵다. 다만 조상의 제사를 잇는 것이 중요하므로 장손에게 별급한다는 취지는 확인할 수 있다. 이 분재기에 이어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분재한 분재기가 붙어 있다. 이 분재기는 작성연대나 서두 부분은 없고 중간에도 멸실된 부분이 약간 있으며, 분재 내역은 없이 父의 遺意만 있는 분재기이다. 여기서도 奉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취지에서 노비 4명을 봉사위로 설정하고 4대 봉사가 끝날 때까지 이들을 몫으로 나눠 갖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봉사조 노비가 소생을 낳아 10구를 넘으면 초과 분량은 나눠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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