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출신 위안부 피해 노수복의 일생

▲ 태국에서 운영하던 찻집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노수복 할머니.연합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6명 증언 담은 사례집 출간



"광산 노가 노수복이. 내 동생 노수만이, 여동생 노순음이"
잊고 있었던 한국말이 40년 만에 터져 나왔다. 일본군 위안부로 태국에 끌려간 (故) 노수복 할머니가 1984년 3월 방콕 한국대사관을 찾아갔을 때다.

노수복은 1921년 경북 안동에서 2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찢어질 듯한 가난으로 14살의 어린 나이에 신랑 얼굴도 보지 못하고 시집을 간다.

남편은 한센병 환자였고 시집살이는 혹독했다. 쫓겨 오다시피한 친정에서 아버지는 "죽어도 시가에서 죽고 살아도 시가에서 살라"고 쫓아내 식모살이 일을 하러 부산에 갔다.

1942년 가을, 부산 근교 우물가에서 빨래하던 중 물을 달라던 일본 순사들에게 잡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40일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은 싱가포르였다.

생전 노수복은 "막사로 가서 방을 하나씩 배정받은 후 조금 있으니 장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몇 차례 실랑이 끝에 매를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지옥 같은 위안부 생활이 시작됐다"고 증언했다.

노수복은 아침에 일어나 군인들의 옷을 빨거나 청소를 하고 오후에는 탄약통을 져 날랐다. 하루 60명의 병사를 맞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7∼8개월 지낸 뒤 군용트럭에 실려 방콕 깐짜나부리로 이동한다. 여기서 일본군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노수복도 영국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된다.

전쟁이 끝난 뒤 노수복은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말레이시아, 태국 등지를 전전한 끝에 태국 핫야이에 정착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룬다. 태국에서 40년 넘게 사는 동안 한국말은 거의 잊었다.

그러던 중 1983년 말 한국에서 이산가족찾기운동을 한다는 것을 알고 방콕 한국대사관을 찾아간 것이었다. 노수복은 1984년 3월 12일 한국의 동생들과 KBS 위성중계방송으로 만났다.

서울시와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은 노수복 할머니 같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6인의 생생한 증언과 미국·태국·영국에서 새로 발굴한 위안부 관련 자료를 담은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 사진과 자료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이야기'를 22일 출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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