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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광고]한국정신문화의 원류, 서원을 찾아서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경광서원(鏡光書院)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는 마을의 지세가 거문고처럼 생겼다고 하여 금지(琴地)라고 불리다가 김성일이 옮겨와 검제로 고치고 한자로는 금계(金溪)라고 했다. 서후면 남동쪽에 경광서원이 위치해 있다.

◇연혁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2리 92번지에 있는 서원이다. 금계리(金溪里) 동편 사천(沙川) 위에 옛날 유정사(有定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사림에서 1568년(선조 1년)서당을 세웠다.1662년(현종 3년) 경광정사(鏡光精舍)로 개칭하였으며, 1649년(인조 27년)춘파리사(春坡里社)를 창건하여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와 용재 이종준(李宗準)의 위패를 봉안했다. 1686년(숙종 12년) 서원으로 승격되어 다시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위패를 모시고 함께 제향하였다.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7년 복설되었으며, 매년 9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구조
강당 앞쪽의 측면으로 나 있는 문을 통해 경내에 들어서면 강당이 서 있고, 그 뒤쪽으로 지형에 맞춰 사당영역이 배치되어 있다. 두 건물은 일직선상의 축에 앉아 있으며, 중간에 영역을 가르는 내삼문이 위치하고 있다. 집의 구조와 마루 등의 짜임에서 구재를 사용한 흔적들이 보인다.

◇사당‘존현사(尊賢祠)’라고 현판이 붙은 사당은 강당의 뒤쪽 조금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기와집으로 측면에는 풍혈판을 붙였다. 주칸에는 쌍여닫이판문을 달고, 협칸에는 외여닫이판문을 달았는데 상부에 문의 윗부분에는 살을 넣어 변화를 주고 있다. 사당으로 출입하는 내삼문은 3칸 규모에 평대문 형식으로 만들었다.

◇강당
경광서원 현판 이외에 ‘숭교당(崇敎堂)’이라는 현판이 마루에 걸려있는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이다. 중앙의 3칸은 마루를 깔고 전면은 문을 달지 않고 개방하였으며, 후면으로는 각각의 칸마다 쌍여닫이판문을 달았다. 마루의 좌우에 방이 연결되어 있는데, 좌측의 방은 한통으로 되어 있으나 우측 방은 가운데에 벽이 있어 한 칸 규모의 방이 두 개 나란히 붙어 있다. 마루에서 양쪽방의 입면을 보면 좌우가 다른데, 이는 기둥의 위치부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문은 외여닫이장지문과 쌍여닫이장지문으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숭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되며 협실은 향사 때 헌관실로 사용되고 있다. 신문은 향사 때에만 열어 제원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매년 9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대지 500평, 전답 4,000평, 임야 5정보 등이 있다 방들의 위에 여러 현판이 걸려 있는데 좌측에는 박약재(博約齋)와 경의재(敬義齋), 우측에는 여담재(麗潭齋)와 시습재(時習齋)라고 쓰여 있다. 동서재가 따로 없기 때문에 강당에 딸린 방들이 그 역할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배향인물

·배상지(裵尙志, 1351~1413) 본관이 흥해이고 자는 부전, 호는 백죽당으로 정평공 손홍량 선생의 외손자이다. 고려 말에 판사복시사를 지냈으나 조정이 문란함에 벼슬을 버리고 안동 금계에 퇴거해 있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비분강개하여 두문불출 하였다. 뒤에 병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실기 1책이 있다.

·이종준(李宗準, 1454~1499)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용헌·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민(太庭逸民)·장육거사(藏六居士). 안동 서후 출생. 만실(蔓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승직(繩直)이고, 아버지는 시민(時敏)이며, 어머니는 현감 권계경(權啓經)의 딸이다. 홍준(弘準)의 형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일손, 권오복 등과 사귀었다.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1등 3인으로 급제하여,1488년 홍문관교리로서 대재학 서거정의 추천으로 사가독서했다. 이어 성균관전적, 경상도지사, 사헌부지평을 역임하고 1493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시명(詩名)을 떨쳤다. 이듬해 의성현령으로서 <경상도지도>를 제작하고 봉록을 털어 향교를 중수하며 학문 진흥에 힘썼다. 당시 그는 풍류로 명성이 있어 일본호송관 또는 북평사(北評事)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고, 의정부사인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역을 지나다가,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 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 이승건(李承健)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譏弄 : 헐뜯고 농간함)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였다.마침내 연산군은 그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 국문 도중 죽었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부제학으로 추증되었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저서로는 ≪용재유고≫가 있다. 시·서·화에 능하였고, 그림은 매(梅)·죽(竹)을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유작은 없다. 현재 장식화풍으로 그려진 <송학도 松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점이 그의 전칭작품으로 전하고 있다.

·장흥효(張興孝, 1564~1633)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행원(行源), 호는 경당(敬堂). 부장(部長) 팽수(彭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김성일(金誠一)·유성룡(柳成龍)을 사사하고, 뒤에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이 높았다. 관계진출을 단념하고 후진의 교도에 전념하여 제자가 수백명에 달하였다. 특히, 역학(易學)을 깊이 연구하여 호방평(胡方平)의 ≪역학계몽통석 易學啓蒙通釋≫의 분배절기도(分配節氣圖)를 보고 오류된 것을 의심, 이를 고증, 연구하여 20년 만에 십이권도(十二圈圖)를 추연(推演)하였다. 12월을 배열하고 24절후를 분배하고, 또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세월일진(歲月日辰)의 수를 그 위에 더하여 <일원소장도 一元消長圖>라 하였는데, 장현광(張顯光)이 이를 보고는 “참으로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라고 극찬하였다. 문하에 이휘일(李徽逸) 등 학자가 있다. 1633년에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교지가 도착되기 전에 죽었다. 뒤에 지평에 추증되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경당문집≫이 있다.

◇일화 및 활동사항

·배상지(裵尙志)
조선이 건국될 즈음인 어느 날, 중서랑(中書郞)이 고사를 이용하여 뜰에서 배상지의 무릎을 꿇리고자 하니 배상지는 즉시 관모(冠帽)를 벗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국이 혼란하여 머지않아 변혁이 있을 것을 깨닫고 사직한 뒤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에 머물던 외조부 손홍량을 생각하며 안동 금계촌(金溪村, 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으로 옮겨가 집을 짓고 살았다.
그 뒤 고려의 운이 다하게 되자 배상지는 집 주위에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꿋꿋한 절개를 보여주는 잣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고 그 집을 백죽당(栢竹堂)이라고 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여러 차례 출사의 명이 내려졌으나 자신의 뜻을 그대로 지켜 나갔다. 은거 중 금오산(金烏山)에 숨어 살던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교유하였다.
배상지는 화평을 힘써 가지며 순후하고 삼가는 것을 교훈으로 하여 과정을 착실히 밟아 나가도록 네 아들을 비롯한 자제들을 훈계하였다. 자제들이 모두 뜻을 돈독히 하고 학문에 힘써서 문아(文雅)로 세상에 이름이 남겨져 ‘배문(裵文)’이라는 말이 있게 되었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일찍이 배상지를 높은 절개와 원대한 식견을 가진 인물로 칭찬하였다.

·이종준(李宗準)
이종준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5세에 글을 익혀 7세에 글의 뜻을 통했다. 10세 때 아버지에게 “경서는 모두 성현이 전해 준 문자이고 때론 그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다. 『주역(周易)』은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세 성인이 직접 쓴 책이니 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의 책이다. 학자(學者)는 『주역』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높이 평가하였다. 13세에 문장을 이루었는데 청수(淸秀)한 풍채에 도량이 쇄락(灑落)하여 신선이 하강한 듯했다고 한다.
일찍이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에게 사사했는데 김종직이 “중균을 보면 가슴이 시원하게 트인다.”라고 했을 만큼 맑고 빼어난 풍채에 성품이 단아하였다. 김종직 문하에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일두 정여창(鄭汝昌),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 우재(迂齋) 박한주(朴漢柱),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과 가까이 사귀며 도의로 상호 격려하였다.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초급 관직을 거쳐 1487년 이조좌랑으로 일본 사신 호송관에 차출되었는데 호송관으로 동래에 이르렀을 때 왜사가 선생의 서화를 얻고 보물을 얻었다고 기뻐하였다. 그 뒤 홍문관교리를 지내고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하였다. 사간원정언 재임 중 외척이 권세를 잡을 조짐을 간하여 강직하기로 조정에 알려졌다. 1494년 의성군수로 제수되어 부임 초에 교궁(校宮)의 퇴폐함을 보고 녹봉을 털어 이건한 뒤 유망자를 모아 송시습례(誦詩習禮)를 하게 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부관참시와 무오오현(戊午五賢)의 치죄를 반대하고 류자광(柳子光)을 극형토록 상주하였다가 오히려 죄를 받았다. 모진 고문에도 신색이 불변하며 말없이 땅바닥에 크게 ‘일(一)’자를 그어 표현하였다. 태장(笞杖) 80에 부령(富寧) 봉수노우역(烽燧爐于驛)으로 귀양 가던 도중 단천(端川) 마곡역에 이르러 이사중(李師中)의 시를 써서 붙였는데 그 시가 연산군을 원망하는 뜻을 품었다 하여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이듬해 장살당하였다. 이종준은 시와 서화에 능하였으며 의약, 복서(卜筮),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다.

·장흥효(張興孝)
경당은 나이 12세가 되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스승으로 모시며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理)를 밝히고 몸을 닦는 것을 학문의 요체로 삼아 『소학』과 『근사록』의 공부에 한결 같이 전념했을 뿐, 과거공부와 같은 영달의 학문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와 같은 어린 제자의 독학정신을 눈여겨보았던 학봉은 “이 사람의 배움은 정력(定力)이 있으니 후일 크게 성취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나의 문생 가운데 이와 같은 인재를 얻으니, 자랑스럽다”며 경당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29세 때 (1593년)에는 양친 상을 당했으며, 33세 때에는 다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하를 찾아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한 번은 한밤중에 스승 서애 유성룡을 모시고 등불을 마주보며 ‘이(理)’자를 논한 적이 있었는데, 서애가 등불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불의 허(虛)한 곳이 이(理)인가’라 묻자 경당이 대답하기를, ‘허(虛)는 실(實)의 대(對)가 되는데, 이(理)에는 대(對)가 없으니 허(虛)로써 이(理)를 삼을 수는 없는 듯 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서애는 곧 응하여 말하기를, “허(虛)에는 허(虛)의 이(理)가 있고, 실(實)에는 실(實)의 이(理)가 있다” 라고 하였다.
이 한가지 일화만 보더라도 스승인 서애가 경당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경당은 ’喜怒哀樂의 未發‘과 ’고요한 가운데서도 모름지기 물(物)이 존재한다‘는 논리를 하나의 학설로 완성하여 정구(鄭逑, 1543~1629)에게 반복하여 변론한 적이 있었는데, 한강은 경당의 학문이 심득(心得)한 것이 있음을 깊이 탄복하였고 서로 알게 된 것이 늦었음을 탄식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37세 때는 경광서당의 당장으로 부임하였다. 여기서 그는 문인들에게 인사하는 법과 예절을 먼저 배우도록 가르쳤으며, 다음에는 사람됨이 진실하고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등 수신(修身)공부를 특히 중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자의 재능에 맞추어 공부의 진도를 차등 있게 나누어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이는 바로 오늘날의 능력별 교수법을 실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한 글자 한 글자 자세하게 풀이해주고, 한 구절 한 구절을 성실하게 가르쳐 한 구절일지라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철저한 교육을 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전형적인 처사적 생활로 일생을 마감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70세였다. 당시 그는 병석에 드러누운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정신은 더욱 초롱하였고 운명하는 날 저녁까지도 『맹자』「양심장」을 외우며 문하의 제자들에게 그 내용을 가르쳐 줄 정도로 철저한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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