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수(실바노) 계산성당 주임신부

누가 나에게 잘못을 하고, 나를 힘들게 하면 어떻게 대할 것인가? 미워하고, 욕도 하고, 싸움도 하고, 아예 상대도 안 하고,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복음에서는 단 둘이 만나서 타일러라. 말을 안 들으면 두세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말을 안 들으면 교회에 알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적당히 해보고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시대를 살아가면서 실천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분야가 사람과의 관계이다.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 ‘왜 남의 일에 참견이냐?’ 라고 반응이 돌아오면 쉽지 않다.

하지만 단순히 세상의 일, 인간적인 일만이 아니라 그것이 신앙적인 것이라면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과 상관이 있는 일이라면) 어떤 모습으로든지 함께 해야 할 과제이기는 하다. 다만 그 방법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는 신중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귀가 둘이고, 눈도 두 개이지만, 입은 하나뿐이다. 두 배로 듣기에 힘쓰고, 두 배로 옳음을 바라보도록 노력하되, 말하기는 극도로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울타리 안에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들, 특히 잘못한 형제가 있을 때 그 형제의 잘못을 판단하기 보다는 신중한 마음으로 상대를 들여다보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감정과 분노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쉽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나의 주관적인 신앙으로 남의 잘못을 함부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시각, 평가, 충고, 관심이 어떤 감정에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바라보고 사랑으로 변화를 기대하는 내 입장으로서의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환경을 배려해 주려는 노력, 그런 삶이 다른 이들에게 다가서는 삶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아쉽게도 너무 자주 우리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진정한 충고를 하지 못하고, 무관심해 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때로는 충고를 하는 게 아니라 잘못을 지적하는 것으로 인격적인 수치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왜 그리 남의 잘못과 부족함은 크게 드러나고 좋은 점들은 꼭꼭 숨어 버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마태 18,15-20. 복음을 정리해 보면 남의 잘못을 지적하라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내 이웃이 내 형제가 잘못된 길을 (특히 신앙적인 삶에서) 가고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서고 변화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이다. 혼자만 잘되는 것, 혼자만 잘사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참된 신앙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도 바친 선조 신앙인들의 삶을 바라보자면 우리는 참 쉽게, 편하게, 편의대로 사는 것은 아닌가 반성도 해보게 된다.

내 삶에서 어떤 것을 더 드러내야 신앙을 증거하게 되는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일 수 있을까를 찾아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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