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욱 정신건강의원장

4월 17일은 ‘세계 혈우인의 날(World Hemophilia Day)’로, 혈우병과 선천성 출혈 질환에 대한 인식을 고취하기 위해 1989년 세계혈우연맹(World Federation of Hemophilia : WFH)에서 제정했다. 2018년 올해 세계 혈우인의 날 슬로건은 ‘지식공유가 힘이다’로, 혈우병에 관한 지식 공유의 중요성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생소한 질병인 혈우병. 과연 혈우병은 어떤 질병이며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혈우병은 피가 날 때 지혈 작용을 하는 12개의 주요 혈액응고인자 중 하나가 부족해서 생기는 질환이다. 따라서 혈우병 환자들은 작은 상처에도 피가 쉽게 나고 잘 멈추지 않게 된다. 유전성 혈우병의 경우 혈액응고인자를 생성하는 유전자에 변이가 발생하여 혈액응고인자가 만들어지지 않아 발생한다. 부족한 혈액응고인자에 따라 혈우병 A, 혈우병 B, 혈우병 C로 나누게 되는데, 혈우병 C는 매우 드문 질환이고 특정 유태인에게 주로 발생하므로, 앞으로는 혈우병 A와 혈우병 B에 대해 다루도록 한다. 유전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후천성 혈우병의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자가항체로 인해 응고인자가 부족하게 되어 발생하는 것으로, 암이나 자가면역질환과 관계가 있다. 유전성 혈우병은 흔하지 않은 병으로 남아 5,000명당 1명 꼴로 발생한다. 혈우병을 유발하는 유전자 변이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을 수도 있고, 정자와 난자가 수정될 때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다. 전체 혈우병 환자의 약 20~30% 정도는 유전이 아닌 돌연변이로 발생한다고 학계에 보고가 되어있다.

혈우병 A는 VIII번 응고인자가 부족하여 생기는 질환으로, 전체 혈우병의 약 85%를 차지한다. 고전적 혈우병이라고 하면 혈우병 A를 지칭하는 것이다. 혈우병 B는 IX 응고인자가 부족해서 생기는 병으로, 나머지 혈우병 환자의 대부분이다. 혈우병 B는 ‘크리스마스 병’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처음 혈우병 B를 진단받은 환자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VIII 응고인자와 IX 응고인자의 수준(활성도)에 따라 출혈의 정도가 비례해서 나타나는데, 중증은 정상 수치의 1% 미만일 경우이며, 출혈이 잦고, 관절이나 근육 내에 자연 출혈이 가능하며, 생명에 위협을 줄 수 있는 부위에도 출혈이 저절로 발생할 수 있다. 중등도는 1~5% 수준으로 작은 손상에도 출혈이 심하며, 자연 출혈도 가능하다. 경증은 6~25% 수준으로, 작은 수술이나 작은 외상 후에 출혈 경향을 보인다.

혈우병 환자의 출혈은 관절강 내 출혈이나 근육 같은 연부조직의 출혈이 문제인데, 연부조직 출혈 시 조직 안에 있는 신경, 혈관, 기도 등 생명과 연관된 중요한 구조물이 손상을 입을 수 있으므로 치료가 필요하며, 구강 내 출혈, 혈뇨 등도 치료가 필요할 수 있다. 머리 손상의 경우 뇌출혈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면밀한 관찰이 필수이며,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

혈우병 환자에게 출혈이 발생했을 때의 치료는 부족한 응고 인자의 보충이다. 과거에는 혈액응고인자가 있는 혈장 혹은 전혈을 사용하였고, 1970년대부터 혈장에서 추출한 농축 VIII인자, 농축 IX인자를 투여하면서 효과적이었다. 잦은 혈액제제 투여로 인해 B형, C형 간염 바이러스나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 등에 감염되는 것이 문제가 되었으나, 최근에는 유전자 재조합 제품이 생산되어 혈우병 치료가 진일보하였다. 또한 유전자 재조합 제품을 이용한 응고인자 유지 요법도 시행한다. 혈우병 A로 인한 출혈의 경우 항이뇨호르몬인 데스모프레신(desmopression)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출혈에 대한 치료뿐만 아니라 반복적인 출혈로 인한 합병증, 특히 혈관절증은 이로 인한 장애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인공관절치환술 등의 정형외과적인 치료가 필요할 수 있다. 또한, 경직된 관절은 물리치료를 시행하면 도움이 된다.

출혈 경향이 있는 환자의 경우 선별 검사로 일반 혈액검사, 출혈시간, 프로트롬빈 시간, 부분 트롬보플라스틴 시간 등을 시행하는데, 혈우병 A, B의 경우 부분 트롬보플라스틴 검사만 연장된 소견을 보인다. 혈우병 환자의 확진은 해당 응고인자, 즉 VIII, IX의 정량 검사로 가능하다. 또한 유전자 검사는 가계도 조사에 활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사회복지법인 한국혈우재단이 설립되어 혈우병 환자에 대한 지원 사업과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으며, 서울, 부산, 광주에 설립된 혈우재단의원에서 혈우병 환우들을 진료하고, 유전 상담 등을 진행하고 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알렉세이 황태자가 혈우병 환자가 아니었다면, 혹은 20세기 초에 혈우병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러시아 역사, 그리고 세계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최근에는 완치를 위해 유전자 치료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으나, 혈우병 A 및 B의 해당 유전자는 크기가 커서, 아직은 실제 치료에 이용하는 것은 요원한 것이 사실이지만, 언젠가 혈우병을 완치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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