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야에나 고수(高手)는 늘 존재한다. 그 고수라는 이름은 남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 온갖 힘든 시련을 묵묵히 감내하며 한 분야에 매진한 결과가 이루어낸 산물일 것이다.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의 판단 기준은 확연히 다르듯이, 자기 분야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알고 보면 스스로의 착각에 다름 아니다.

나보다는 남들이 먼저 고수인지 아닌지는 알아본다는 것을 현명한 사람은 안다. 하지만 남들이 최고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조차도 스스로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스스로는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수위에, 한 수 위인 또 다른 고수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자신이 갇힌 감옥의 문을 두드릴 권리가 없는 죄수"라고 말했다. 결국 나를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은 남이다. 이처럼 고수로 대접하고 인정해주는 것도 타인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남이 인정해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최고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가끔씩 눈에 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얼치기라고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얼굴은 육체의 영혼' 이라 했고, 키케로는 '모든 것은 얼굴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불혹(不惑)의 나이가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할 때라고 했다.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할 나이를 링컨은 마흔, 조지 오웰은 쉰을 기준으로 삼았다. 우리는 누구나 삶이라는 자기만의 꽃을 피우며 살아간다. 인생이란 무대에서 배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말이다.

자기가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해서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루었을 때란 대부분 나이가 든 후이다. 그러나 그 때야 말로 타인에 의해 인정받게 되는, 자기 얼굴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모두가 함께 늙어간다. 같이 늙어 가면서도 어떤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지는 삶을 살고, 어떤 사람은 부끄러운 얼굴로 살아간다.

고수는 남모르게 피 말리는 고통과 자신과의 고뇌와 들끓는 갈등으로 수많은 날을 불면으로 새웠을 것이다. 때로는 준엄한 자기 검증을 거치기도 했을 것이다. 그 힘든 과정을 남들이 어떻게 알까마는 고수의 얼굴에 나타난 모습에서 우리는 말 할 수 없는 침묵의 소리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사느라고, 꼭두각시 같은 삶을 사는 요즘 사람들은 너무 바쁘다. 명문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이름 있는 강사를 찾아다니는 학생들,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취업 재수를 하는 청년들, 더 넓은 아파트로 가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부부들, 남들보다 비싼 차, 아끼고 줄이면서 통장의 저금을 빵빵하게 채우려는 사람들…….

이런 것에다 모든 것을 거는 현대인들은 이미 고수의 본능을 모두 상실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행복을 포기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과 자기만의 역할은 포기하고, 남들처럼 따라하기 쟁이가 되어 인간의 진정한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 물질적인 욕망이다. 그런데도 끝없이 탐욕을 따라 죽을 때까지 쫓아간다. 정신없이 물질적인 허상을 따라 가다가 항상 내 앞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사소한 행복들을 놓치고 나서 죽음에 이르러서야 번쩍 정신을 차린다.

헛된 세월, 부질없는 것에 매달려 자신의 인생을 소모적으로 낭비했다는 것을 깨닫고 인생의 허망함을 느낀다. 그 때는 이미 늦다. 그런 것에 탕진해 버린 내 인생 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삶에서 깨달음은 늘 이렇게 늦게 찾아온다.

고수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하여 남보다 아름다움을 먼저 깨닫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 모두가 부질없는 물질적 욕망에 사로 잡혀 행복한 일상의 순간들을 모두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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