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 호계서원(虎溪書院)

원래 월곡면(月谷面) 도곡동(道谷洞)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 수몰지구로 1973년 임하면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안동시에서 영덕방향으로 12km지점에 있으며, 안동버스터미널 옆 버스정류장에서 11번 시내버스로 30분가량 소요되는 임하면 임하리 84-3번지에 있었다.

그러다 최근 호계서원복설추진위원회, 영남유교문화진흥원, 경북도지사, 안동시장의 협의를 거쳐 문중 간에 호계서원 복설을 추진하기로 합의하고, 습기로 훼손된 서원을 총사업비 4억7천만원을 투입, 성곡동 안동야외민속박물관 일원으로 이전해 건립 중이다.

사당의 복설은 경북도 문화재위원회 고증 등의 절차를 거쳐 추진하고 대산 이상정(1711∼1781) 선생을 추향하기로 했다. 호계서원은 1573년 여강서원으로 창건, 1676년 숙종 때 사액을 받으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퇴계 이황을 모신 곳으로 1620년 퇴계선생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류성룡(1542∼1607)을 배향하는 과정에서 서열 문제로 '병호시비(屛虎是非)'가 일었고, 이로 인해 400여 년 간 영남 유림 및 문중 간 상호 갈등을 빚었다.

◇연혁
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에 있는 서원이다. 1575년(선조 8년)사림이 안동부(安東府)동쪽 여산촌 오로봉(五老峯) 아래 백련사지(白蓮社址)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을 건립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학(道學)을 강론하였으나, 1605년(선조 38년) 대홍수로 유실되자 중창했다.
1620년(광해군 12년) 이황의 고제(高弟)인 서애(西厓) 유성용(柳成龍)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추향(追享)하였다. 1676년(숙종 2년) 사액되면서 ‘호계(虎溪)’로 개명되었으며, 그 이후 이황은 도산서원에, 유성용은 병산서원에, 김성일은 임천서원에 각각 옮겨 주향되었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7년 뒤인 1875년(고종 12년) 중건되었다.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지금 위치에 이건 되었다.

◇구조
강당은 맞배지붕 건물이며, 중앙은 마루이고 양 측면에 방을 두었다. 평면상으로 볼 때 ‘一 ’자형의 건물이지만 지붕의 양쪽 끝이 정면을 보고 있는 ‘工’자형의 매우 특이한 형태이다.

◇강당
강당인 숭교당(崇敎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양쪽 끝 칸의 지붕을 맞배로 꾸매 위에서 본 용마루의 모습은 ‘工’자형이다. 중앙의 3칸을 마루로 하였으며 전면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고, 후면으로는 쌍여닫이판문을 달았다. 건물의 측면이 3칸으로 되어 있어 마루가 9칸으로 넓은 편이고, 상부의 구조도 서원에서도 드문 7량으로 조성되어 있다. 마루의 좌우에는 방이 연결되어 있는데 대칭으로 앞의 두 칸 방, 뒤의 한 칸 방으로 나누어져 있다. 앞의 방들은 전면, 마루 쪽, 측면으로 창과 문들이 나있으나 뒤의 방들은 마루 쪽으로 외여닫이문이 있고 측면으로는 광창만 두었다. 전열의 기둥 중 중앙의 2개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고직사
평면의 전체적인 구성은 ‘□‘자집으로 가운데 마당을 둔 이 지역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전면이 개방된 3칸 대청의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고 아래에 부엌과 아궁이를 연결하였다. 대문의 좌우에는 고방과 광등이 이어지고, 안방과 건넌방 아래에서도 외부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이 나있다.

◇배향인물
이황, 유성용, 김성일을 제향했으나 현재는 없는 상태다.

◇병호시비(屛虎是非)
1620년(광해군 12년) 여강서원을 건립하면서 발생한 유성룡과 김성일의 배향(配享) 때 위차(位次) 시비를 계기로 안동을 비롯한 영남 유림들이 병파(屛派)와 호파(虎派)로 나뉘어 전개된 향전(鄕戰)이다. 1620년 이황(李滉)을 주향으로 모신 여강서원을 건립되면서 이황의 대표적인 제자인 유성룡과 김성일의 배향이 결정되었는데, 이때 양인의 위패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제기되었다. 정경세의 자문을 받아 류성룡을 동쪽에, 김성일을 서쪽으로 배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후 19세기 초반 류성룡과 김성일 등의 문묘 종사 청원과 이상정(李象靖)의 서원 추향(追享) 문제 등으로 병파와 호파가 대립하였다.
병호시비의 연원은 1620년 여강서원(廬江書院)을 건립하면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배향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여강서원은 퇴계 이황을 주향으로 하는 서원이므로, 퇴계 사후의 적전화(嫡傳化)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서원에 양인의 배향이 결정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거니와, 배향으로 결정된 후 가장 큰 난제가 양인의 위차 문제였다. 같은 배향이지만 동(東)·서(西)에 대한 인식상의 차등이 있었고, 위차에 따라 양인의 지위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여강서원이 이황의 주향처라는 점에서 위차는 도학(道學)의 고하를 논하여야 하지만 이를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였기에 현실적으로 작위(爵位)와 나이가 그 기준으로 제시되었다. 유성룡 계열에서는 작위를 내세워,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을 동쪽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고, 김성일 계열에서는 나이를 내세워 4살 위인 김성일을 동쪽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논란 속에 당시 영남을 대표하던 정경세(鄭經世)의 자문을 받아 유성룡을 동쪽에, 김성일을 서쪽에 두는 ‘애동학서(厓東鶴西)’로 결정되어 일단락되었다.
김성일 계열에서는 불만이 있었으나, 당시 정경세의 위치 등을 감안하여 그대로 따르면서 논란이 일단락되었다.

여강서원은 1676년(숙종 2년) 중앙 남인 세력의 지원을 받아 호계서원(虎溪書院)으로 바뀌어 사액을 받았다. 이런 과정에서 유성룡 계열은 풍산의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중심으로 활동한 반면, 김성일 계열은 호계서원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해갔다. 이런 이유로 유성룡 계열을 병파, 김성일 계열을 호파라 불렀다. 1796년(정조 20) 김성일과 유성룡·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에 대한 문묘(文廟) 종사(從祀)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때 호파의 주도로 나이를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이 관철되었다. 이로부터 병파는 약 10여 년 동안 호계서원 출입을 하지 않았다. 1805년(순조 5년) 이들에 대한 문묘 종사 운동이 다시 추진되는 과정에서 병파의 강력한 항의가 제기되면서 분란의 불씨가 제공되었다.

이후 1812년(순조 12년) 호파에서 이상정(李象靖)을 호계서원에 추향(追享)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는 이상정의 추향을 통해서 호계서원이 이들의 거점이라는 사실을 표방하며 퇴계학파의 최대 계파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병파는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통문을 돌리는 등 반발하였다. 이에 관찰사가 나서서 이를 중재하려고 하였으나, 병파는 정치력을 동원하여 호파를 압박하였고, 호파는 혈연, 학연, 지연을 동원하여 대응하면서 양자의 사이를 벌려나갔다.

양측의 시비를 보합하려는 노력이 고종 초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고종 3년) 유성룡의 8대손인 유후조(柳厚祚)를 정승으로 임면하고, 안동부사에게 시비의 진상을 파악해 해결방안을 모색하도록 하는 한편 보합을 위한 조정책을 거부하는 자를 적발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지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등 복잡한 정세로 인해 시행되지 않았다. 1870년(고종 7년) 8월 흥선대원군은 다시 안동부사에게 보합에 대해 지시하였고, 8월 27일 호계서원에서 호파의 유림 600여 명, 병파의 유림 400여 명이 모여 논의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이 시비를 국가적 사건으로 간주해서 충역(忠逆)의 기준으로 논단할 수도 있다는 의향을 비치며 해결을 지시했다. 결국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병산서원에 보합을 촉구하는 통문을 보내는 한편, 양측의 일부 인사들이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보합적 분위기가 마련되면서 흥선대원군은 보합의 상징적인 조치로 병파와 호파의 주장을 담은 『여강지(廬江志)』와 『대산실기(大山實記)』의 목판과 판본을 불태우도록 지시했다. 같은 해 12월 14일 대구 감영에서 소각함으로써 상징적으로 논란이 종식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호계서원이 훼철(毁撤)되면서 양측의 시비가 온존하는 가운데 2013년 5월 호계서원의 복원 사업을 계기로 경상북도에서 내놓은 중재안이 받아들여져 류성룡을 동쪽에, 김성일을 서쪽에 배향하며, 이상정을 서쪽에 배향하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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