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모메디치를 만나다’

사랑하는 줄리엣을 만나기 위해 로미오는 담장을 넘어 발코니에 올라서자마자 줄리엣의 손을 잡는다.
“나의 손으로 더럽혀진 그대의 손을 나의 입술로 씻게 해주오”
그리고 줄리엣의 손에 입을 맞춘다. 셰익스피어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도시, 베로나에서 줄리엣의 집을 방문했다.
수많은 연인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벽에는 온통 전 세계 방문객들이 그려놓은 사랑의 낙서들로 가득하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은 대단하다. 얼마전에 TV프로, 팬팅싱어에서‘아모르 시 무베’노래가 감동적으로 불려 졌던 기억이 난다.
아모르(amor) 라틴어로 ‘mor’은 죽음을 뜻하고 ‘a’는‘저항하다’의 의미다. amor의 직역은 ‘죽음에 저항하는 행위’가 된다.
뜨거운 사랑은 죽음도 넘어선다.

아레나 극장과 에르베 광장을 둘러보고 베로나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로비고로 가서 일박을 하고 피렌체로 향했다.
150년에 걸쳐서 완성된 피렌체의 두오모(대성당)인 산타마리아 성당과 세례당을 지나 시뇨리아 광장에 도착했다.
멋진 대리석 조각상들이 드라마틱한 동작과 비극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한쪽 길에는 양쪽으로 피렌체를 빛낸 28개의 동상들이 줄지어 있는데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단테, 복카치오, 지오토, 도나텔로. 그리고 꼭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다.

따로 광장 한 쪽을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그는 말을 타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말을 타고 있는 동상은 황제 밖에 없는데 유일하게 이 사람은 말을 타고 있다. ‘코시모 메디치’다.
위대한 천재들이 활동했고 그 천재들을 품고 도시를 경영하고 교육체계를 만들고 예술을 경영한 지도자, 그가 코시모 메디치다.
당시 인구 5만명에 그렇게 많은 천재들이 동시대에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고 한다. 메디치 가문은 14세기에서 18세기까지 350년 동안 이어졌고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다.
고교시절 줄기차게 목탄소묘로 그렸던 줄리아노 메디치도 이 집안 장군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마지막 작품은 ‘성 세례 요한’이다.
오른손 검지가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포즈의 이 그림은 다빈치 코드의 마지막 의미라고도 한다. 세례 요한은 메디치가문의 터전인 피렌체의 수호성자이고 1513년에 69×57cm의 나무판에 유화로 이 작품을 제작할 때 다빈치는 로마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가 현직으로 있었다고 한다.
다빈치도 피렌체 출신이고 그 이름 또한 피렌체 근처에 있는‘빈치’마을의‘레오나르도’라는 뜻이다.
다빈치는 말년에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가는데‘모나리자’와‘성 세례 요한’그림 또한 갖고 가게 된다. 지금 이 그림들은 프랑스 루브르에서 볼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은 레오 10세가 다빈치에게 이 작품을 의뢰하기 100년 전에 아주 희귀한 유물인 ‘세례 요한의 손가락’을 한 점 소장하게 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시작은 조반니 메디치에서 출발한다.
조반니가 1385년 새로 문을 연 메디치은행(3위권 은행)의 로마 지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대의 은행은 고객들의 신뢰를 얻어야 됬고 교황청의 자금을 움직일 수 있어야 성장했으며 남몰래
사채업을 해야 많은 돈을 벌었다.
노심초사하며 일하던 시절 고객으로 나폴리 출신의 귀족 발다사레 코사가 찾아왔다.
그는 원래 해적질과 해외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세계최고 대학인 볼로냐 대학의 법학박사 학위를 매입해서 가짜박사가 되고 추기경직을 매입하기 위해 영세하고 로마에서는 3류 은행인 메디치은행을 찾아온 것이다. 중세에는 해적도 비상시에 해군으로 편입되기도 했으며 성직매매가 꽤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메디치은행의 돈으로 추기경이 된 코사가 1410년에 ‘요한 23세’교황이 된 것이다.
당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분쟁으로 교황청이 로마와 아비뇽으로 양분되어 2명의 교황이 존재했다가 다시 피사에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어 3명의 교황이 존재했다.
그런 상황에서 피사의 교황이 1년 만에 서거하고 코사가 법명이‘요한 23세’인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메디치은행은 최고의 고객인 교황과 거래하며 교황청의 돈을 주무르게 된 것이다.
3명의 교황이 난립하게 되자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시지문드가 독일의 콘스탄체에 종교회의를 소집해서 3명의 교황을 초대해서 강제로 폐위하고 새로운 교황을 내세웠다. 요한 23세(코사)는 체포되어 여러가지 종교적, 사회적 죄를 물어 거액의 벌금까지 부과 받고 감방에 갇혀 전 재산이 털리는 상황까지 왔다.

거지가 된 요한 23세는 메디치은행에 손을 내밀었다.
독일에 파견되어 이 교황 옆에 있던 사람은 조반니 메디치의 장남 코시모 메디치였다.
코시모는 즉시 변장을 하고 탈출하여 피렌체로 가서 아버지와 독대하여 요한 23세의 벌금을 전액 대출해 주자고 했다. 조반니 메디치는 아들의 말에 흔쾌히 동의한다. 권력을 잃고 거지가 된 교황을 밀어준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 페렌체에서 임종한 요한23세의 유해는 피렌체의 두오모인 산타마리아성당의 세례당에 영묘를 꾸며 모셨다. 현직 교황의 질시와 항의에도 불구하고 ‘전임 교황 요한23세’라고 기록까지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었다.
요한 23세가 죽기 전 끝까지 간직하고 있던 성물, 세례 요한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메디치 가문에게 줬다. 어려울 때 의리를 지켰고 신뢰를 지켜준 보답이었다.
메디치 은행은 이 교황 때문에 거액의 부채를 안았으나 독일의 왕실과 교황청의 지도자들은 감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한번 맺은 고객과의 관계를 끝까지 배신하지 않는 메디치은행으로 거래를 텄다.
새로 선출된 교황 마르틴 5세는 메디치 은행을 교황의 주거래은행으로 정했다.
그리고 메디치가문에서 두 명의 교황이 나왔고 첫 번째가 레오 10세이다. 레오 10세는 다빈치에게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을 의뢰했고 이 그림은 르네상스를 빛낸 메디치 가문의 정신, 즉 변치 않는 ‘의리와 신뢰’를 나타낸 것이다.
일류의 작품에 가격을 신경 쓰지 않았던 코시모 메디치는 그의 손자 로렌초 메디치와 더불어 중세 유럽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창조적 지도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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