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숙원을 현실로… 대역사의 ‘서막’

▲ 스마트팩토리
우리나라는 1950년대부터 ‘산업의 쌀’인 철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종합제철 건설을 시도했지만 외자를 조달하지 못해 네 차례나 실패했다.

종합제철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1964년 독일에 이어 1965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코퍼스사의 포이 회장과 국제차관단 구성에 관해 논의한 것이 계기가 돼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 꾸 려지고 종합제철 건설의 꿈이 가시화되는 듯했다.

KISA와의 종합제철 사업이 원만하게 진행되자 정부는 1967년 포항을 종합제철 입지로 선정하고, 대한중석을 종합제철 실수요자로 확정했다. 같은 해 ‘종합제철건설사업추진 위원회’ 발족 등을 거쳐 포스코는 1968년 4월 1일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힘찬 출발에도 외부 여건은 녹록지 않았다. 1969년 초 KISA를 통한 외자조달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종합제철의 꿈은 다시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었기에 정부와 회사 관계자가 모두 나서 대안을 모색했고 ‘대일청구권자금’ 전용이라는 마지막 희망을 찾아냈다.

뜻이 있으면 길이 보이는 법. 우여곡절 끝에 1969년 8월 ‘제3차 한일각료회담’에서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 종합제철 건설 사업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종합제철 건설 대역사는 1970년 4월 1일 경상북도 영일만에서 포항 1기 설비 종합착공과 함께 시작됐다. 영일만 대역사의 서막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우향우 정신’으로 매진…불가능을 넘다

제철소 건설이 시작되자 현장의 모든 직원은 실패하면 ‘우향우’ 하여 영일만에 빠져 죽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밤낮없이 건설에 매달렸다. 1971년 열연공장 기초공사가 늦어지자 박태준 사장은 하루에 콘크리트를 700㎥씩 타설하는 ‘열연비상’을 선포했다. 철야작업을 강행한 끝에 전체 공기를 오히려 1 개월이나 앞당겼다. 이후 공기준수를 위한 포스코 특유의 24 시간 돌관공사가 시작됐다.

포스코는 선(先)공정인 제선·제강공장부터 건설하는 ‘포워 드 방식’을 따르지 않고 후(後)공정인 열연·후판공장부터 건설했다. 해외에서 반제품을 수입해 완제품을 생산하고 여기서 생기는 이윤을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첫 출선은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에 이루어졌다. 전 임직원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 포스코는 그 해 7월 조강 연산 103만 톤 규모의 포항 1기 공사를 마무리 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제철 탄생을 대내외에 알렸다. 경제발전과 산업화를 우리 손으로 일구겠다는 열정과 집념은 설비 준공 4개월 만에 정상조업 달성, 조업 첫해 흑자 기록으로 이어졌다.

설비 증설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확장공사를 하는 가운데 조업을 하는 일면조업, 일면건설의 상황이었다. 건설공사를 차질 없이 진행함과 동시에 완벽한 조업을 이루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로지 전진뿐이었다.

특히 3기 건설은 건국 이후 최대 규모의 공사였다. 규모가 큰 만큼 공사 관리에 난항을 겪기도 했다. 공기단축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불량시공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 아래 불량시공 구조물 폭파가 단행됐다.

1977년 8월 80% 가 끝난 발전송풍시설의 기초 콘크리트 구조물 폭발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듬해 ‘건설 비상’이 선포됐고, 직원들은 추석연휴까지 반납하며 총력 건설체제에 돌입했다. 완벽시공 정신은 광양제철소 건설로 이어졌고, 포스코 품질제일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제철보국의 사명감으로 확장 사업을 계속한 포스코는 1981년 2월 4기 종합 준공과 함께 ‘영일만의 기적’이라 불린 대성취를 이뤄냈다. 이후 1983년 5월 4기 2차 설비 준공으로 조강생산량은 910만 톤으로 늘어났다.

▲민영화로 새로운 도약…선진 경영체제 시동

1990년대에 들어서자 신자유주의 물결과 함께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포스코는 세계화 시대에 대응해 글로벌 경영을 본격화했다.

지속성장을 위한 자금을 해외에서 조달하기로 하고 1994년 10월 국내 기업으로는 최초로 뉴욕증시 상장에 성공해 해외 자금의 국내 유치에 기여했다.

이는 포스코가 국제적 신인 도와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기업으로 공인받았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후 1995년 런던증시, 2005년 도쿄증시 등 세계 3대 증권시장에 성공적으로 상장해 안정적 자금조달의 기반을 확보하고 기업 이미지와 신용도를 높이는 효과를 거뒀다.

한편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해외진출과 투자를 가속화했다. 중국과의 수교가 체결되기 전인 1991년 중국에 베이징사무소를 개설한 데 이어 1997년 장가항포항불수강을 설립했다. 1990년대 초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기 시작한 베 트남에도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갔다.

포스코는 다른 공기업과는 달리 정부가 대주주인 상법상의 주식회사로 출범해 민간기업의 효율성과 전문경영인에 의한 책임경영을 견지해 왔다.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경영위원회와 인사위원회를 통해 의사결정과 인력운영의 효율을 높이고, 1997년에는 국내 대기업 최초로 전문경영진의 책임경영과 이사회의 경영감독 기능을 강화한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해 경영의 투명성을 높였다. 이후 CEO와 이사회 의장직을 분리해 기업지배구조를 한층 선진화시켰다.

대외적으로는 민영화 추진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 포스코의 민영화는 외환위기의 파고가 정점에 달했던 1998년, 정부가 국가 경제 회복과 경쟁력 제고를 위해 포스코를 최우선 민영화 기업으로 선정하면서 빠르게 진행됐다. 3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포스코는 2000년 10월 민영기업으로 거듭났다.

민영화는 제2의 창업이라 불릴 만했다. ‘민영’ 포스코는 2002년 3월, 34년간 사용해온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라는 이름 대신 ‘주식회사 포스코’로 사명을 변경하고, 지속적인 프로세스 혁신(PI:Process Innovation)으로 경영시스템 선진화에 총력을 다했다.

1999년 시작된 PI를 통해 구매, 생산, 판매 등 전 부문의 업무 프로세스를 재정립하고 디지털 통합 시스템인 ‘포스피아(POSPIA)’를 구축했으며, 이후에도 6시그마, QSS 등 끊임없는 혁신의 여정을 걸어왔다.

▲창조적 혁신기술 개발…초일류 기업 기반 다져

4반세기에 걸친 건설 대역사를 끝내고, 민영화와 PI를 통해 선진 경영체제의 기틀을 마련한 포스코는 진정한 의미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해야 할 시대적 과제와 마주했다.

글로벌 철강사 위상에 걸맞은 고유기술 개발을 추진해온 포스코는 세계 철강기술을 선도할 수 있는 창조적 혁신기술 개발에 매진했다. 오랜 연구개발을 거쳐 완성한 파이넥스 공 법은 용광로 제철공법을 대체하는 혁신 제선공법으로, 포스코 성공역사의 진수다.
포스코는 2007년 연산 150만 톤 규모의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를 성공적으로 가동하며 세계 철강 기술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신주조기술인 스트립캐스팅의 상용화를 본격화하는 등 기술자립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디뎠다.

포스코는 고급강 생산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등 철강 본원 경쟁력 강화에 역량을 결집하는 한편, 새로운 사업기회를 찾아 글로벌 비즈니스를 더욱 확대했다.

광양제철소를 세계 최고의 자동차강판 제철소로 만든다는 기치 아래 관련 설비 증설에 집중 투자해 2005년과 2006년 5CGL, 6CGL을 각각 준공하고 자동차강판 연산 650만 톤 체제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차강판 공급사의 위상을 확보한 포스코는 자동차강판 생산규모에서 세계 2위로 발돋움하는 비약적 성공을 거뒀다. 전기강판 및 API강 재, 스테인리스 등 고부가가치 전략제품의 생산 설비 증설도 밀도 있게 진행됐다.

장가항포항불수강 스테인리스 일관 생산설비와 베트남 냉연공장, 해외 최초 자동차강판공장인 멕시코 CGL이 이 시기에 탄생했고 중국, 베트남, 인도 등지에 가공센터와 물류기지가 속속 들어섰다.

▲글로벌 경영 강화…매출 60조 원대 그룹 성장

포스코는 글로벌 초우량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대형 M&A를 성사시키며 사업 영역 확대와 사업군 간 시너지 창출을 도모했고, 그 일환으로 2010년 대우인터내셔널(현 포스코대우)을 인수했다.

대우인터내 셔널의 인수는 글로벌 판매 채널 확대와 그룹사 동반성장을 위한 시너지 창출의 기폭제가 됐다. 이에 포스코는 그동안 40조 원대에 머물던 연결 매출액을 60조 원대로 끌어올리며 명 실상부한 초대형 그룹사로 발돋움했다.

이와 함께 국내는 물론 해외사업장을 모두 아우르는 ‘원 (One) 포스코’ 구현에 나서는 한편, 고객 맞춤형 기술 서비스를 제공하는 EVI활동도 본격화했다. 특히 글로벌 자동차사를 대상으로 고객이 필요로 하는 모든 제품에 대한 EVI활동이 가능하도록 기술지원 서비스를 대폭 확대했다.

포스코의 해외 신흥시장 투자사업은 한층 활기를 띠었다. 2011년 중국 장가항포항불수강에 연간 스테인리스 100만 톤 생산체제를 완성하고, 2013년에는 동남아시아 최초의 일관제 철소를 인도네시아에 준공했다.

동남아시아 첫 일관밀인 크 라카타우포스코는 포스코그룹 자력으로 건설했기에 더욱 뜻 깊다. 이 밖에 인도·터키·베트남 냉연공장 등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포스코의 적극적인 해외진출은 계속됐다.

한편 1992년 이후 지속적인 설비증강과 합리화, 조업기술 개발 등을 통해 포스코의 조강 생산량은 4000만 톤으로 확대됐다. 4반세기 대역사 완성 후 20여 년 간 대규모 제철소 한 곳을 새로 건설한 셈이다.

▲극한의 구조조정…‘위대한 포스코 재창조’

포스코는 창사 이래 여러 외부 변수에도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해 왔으나 세계적인 철강 공급 과잉과 과거의 성장 위주 투자로 재무구조가 악화되면서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이에 포스코는 내실있는 성장을 통한 ‘POSCO the Great(위 대한 포스코 재창조)’를 새로운 비전으로 선포했다. 위대한 포스코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창조하자는 의미였다.

철강 본원 경쟁력 강화, 신성장사업의 가시적 성과 창출, 사업구조 혁신 가속화, 윤리기반의 경영 인프라 구축을 전면에 내세우며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비핵심 철강사업은 매각하고 유사한 사업부문은 합병해 효율성을 높였으며 낭비를 제거했다.

4년여에 걸친 혹독한 구조조정 결과 7조원 규모의 누적 재무개선 효과를 거뒀다. 한때 71개까지 늘어났던 국내 계열사 가 38개로 줄었고, 연결부채비율은 2010년 이래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한편 구조조정의 성과를 경영실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철강 본원 경쟁력 강화는 솔루션마케팅과 월드프리미엄 (WP)제품 판매 확대라는 양 날개로 추진했다.

최근에는 그룹 본연의 사업에 ICT를 융합하는 스마타이제 이션(smartization)을 추진해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해 나가고 있으며, 에너지저장 및 경량소재 분야에서도 미래성장 동력을 창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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