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수(실바노) 계산성당 주임신부

지난 주 토요일엔 좀 특별한 혼인미사를 집전했다. 왜 특별하다고 표현해야 할까? 생각해 봤지만 그 혼인미사가 많은 가정에서 자녀들을 혼인시킬 때 귀감이 되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할 수 있어서 그렇다. 신부(결혼하는 당사자)가 대학을 부산으로 가서 부산에서 세례를 받고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우리 본당에서 혼인미사를 할 수 있겠냐고 묻길래 그래라 했다. 그때까지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신랑 쪽은 부산사람이고 신자가 아무도 없었다. 신부 부모는 흥해에 사시고 있는데 역시 신자가 아무도 없었다. 신랑 쪽, 신부 쪽 통틀어서 신부 혼자만 신자였다. 그런데도 성당에서 혼인미사를 했다.

예식장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유는 있다. 딸 가진 부모라서 할 수 없이 그런다. 아들 가진 부모도 사돈댁이 안 믿는 집안이라 강하게 요구하지 못했다. 이런 모습과 비교가 되고, 많이 새겨야 할 귀감이 되는 것 같아서 특별하다고 소개했다.

소작인들의 모습을 정리해보자. 주인이 맡겨 논 포도밭의 소출을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냈는데, 종들을 붙잡아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더 많은 종들을 보냈는데도 같은 짓을 하였다. 아들을 보냈지만 그 아들마저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내야할 당연한 몫을 주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주인이 순진한 것일까? 소작인들이 무모한 것일까? 를 먼저 생각해 본다. 주인은 물론 하느님이시다. 종들은 수많은 예언자들이다. 아들은 예수님이다. 소작인들은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느님께 드려야할 당연한 몫을 욕심 때문에 내어놓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전해 받아서 치워가고, 나누어주고, 물려주어야 할 자랑스러운 믿음의 삶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충실하게 관리하고 하느님께 드리고 있는가? 는 많이 걱정하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열심히 일하지만, 믿음의 삶을 산다고 하지만 우리의 자녀들은 믿음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가꾸어주고, 관리하고,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학생들 스스로에 의해서, 부모의 강요에 의해서, 학업이라는 핑계로,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신앙은 자유라는 위험천만한 생각으로 방치되고 죽어가고 있다.

장례가 발생하면 연도를 간다. 아쉽게도 자녀들 중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자녀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냉담, 조당, 그냥 판공성사 정도만…….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슬퍼한다. 그래야한다. 하지만 자신의 신앙의 삶의 주소를 슬퍼하는 자녀는 잘 없다. 이런 자녀들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지 않으려고 세상 속으로만 숨겨놓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 놓고는 내 것이라고 종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소작인과 같은 행동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 삶에서는 그럴듯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로 절대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믿음의 삶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준 삶을 풍요롭게 하고, 결실을 맺도록 성장시켜 가는 것이다.

소작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지 않으려는 욕심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선물을 어떻게 관리하고 성장시키고 열매 맺게 하고 있는지?
나만이 아니라 내게 맡겨진 자들의 삶에 대한 관리도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지 못하는 그런 믿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다. 소출도 제대로 바치지 않으려고 예언자들을 죽였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소작인들을 대신할 다른 민족을 세우신다. 우리 삶에서도 내가 얻어야 할 하느님 사랑과 은총이 내 관리소홀로 다른 이들에게 빼앗기는 소작인 같은 삶은 살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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