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기

한 마리 암탉을 장닭이 집요하게 쫓고 있다. 정분(情分)난 암수가 사랑싸움을 하는 것도, 수컷의 열렬한 구애작전도 아닌 듯 보인다. 마침내 구석에 몰린 암탉을 장닭이 사납게 쪼아대도 전혀 대항하려 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암탉은 장닭에게 괴롭힘을 당해 온 듯 보인다.
드문드문 산 벚꽃이 피어 있는 고졸한 암자 옆의 닭장. 짧은 머리에 비스듬히 군용 배낭을 어깨에 걸친 청년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제대를 하는 날, 미처 다 비우지 못한 군기(軍紀)와 잃어버린 모정의 세월 이십 년을 배낭에 담고 어머니의 암자를 향해 선걸음에 달려왔다. 그러나 선뜻 암자를 들어서지 못하고 닭장 앞을 서성 거린지도 반나절. 긴 겨울어둠 뚫고 나와 열흘 붉다가 분분히 흩어지는 산 벚꽃이 청년의 머리 위에서 날리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암탉의 신음소리도 잦아들 때 쯤, 암자의 문이 열리고 모이를 든 청년의 어머니가 나타났다. 등 뒤로 조용히 다가오는 어머니의 존재를 느꼈을까. 청년이 짊어 진 배낭에 걸린 작은 고리가 가늘게 떨린다.
“저 장닭 격리 시킵시다.” 나지막하니 그러나 단호하게 청년이 말했다. 그때였다.
잠깐 조는가 싶던 장닭이 다시 설치기 시작했다. 장닭은 목줄대가 터져나가라 울어 젖히며 난폭함을 드러냈다. 푸드득 푸드득 쫓기는 암탉의 엉덩이에서 뽑힌 털이 허공에 날린다. 잠시 평화로웠던 닭장의 공기마저 핏발 선 장닭의 광기에 싸늘해진다. 겁에 질린 암탉이 비굴하게 엎드려 짝짓기를 유도해 보지만 모질게 대가리만 쫓겼다. 놀라 구석지로 몰려간 병아리들이 떼 창으로 울어댄다. 이 순간 아수라장이 된 닭장 안에 장닭을 제어할 상대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암탉의 뒤를 병아리들이 숨 가쁘게 따라 다닌다. 영문도 모른 체 구석을 전전하는 어미를 쫓아 병아리들의 짧은 다리가 굴렁쇠 굴러가듯 구른다. 장닭의 횡포가 극에 달했다고 느꼈을까 가슴을 움켜잡고 청년이 잠시 비틀거린다.
“저러다 죽겠네.” 재차 장닭의 격리를 다그치는 청년의 목소리가 격하게 떨린다. 그러나 등 뒤에 선 어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저 녀석이 닭장을 지킨다.” 외마디 비명 같은 한 마디였다. 외진 산 속이라 낮에도 도처에서 호시탐탐 닭장을 노리는 적들은 많았다. 날카로운 부리와 힘센 발톱으로 무장하고 눈을 부라리며 닭장의 안녕을 위해 긴장해야만 했다. 약육강식의 험한 산속에서 오직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것이 지금껏 닭장의 생목숨들이 건재한 이유였다. 그러나 그 강한 생존방식의 본능이 난폭한 성정으로 굳어 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모가지를 외로 꼬고 암탉이 비명에 가까운 신음소리를 낸다. 바라보면서 함께 느끼는 고통일까. 고개를 돌려 허공을 향하는 어머니의 눈가가 촉촉이 젖는다. 마침내 피를 흘리며 쫓기는 암탉의 탈출구를 찾아주기라도 하려는 듯, 어머니가 닭장 문을 열었다. 그날 밤. 청년의 할머니가 가엾은 며느리를 위해 대문을 열어 놓았던 것처럼. 그러나 겁에 질린 병아리를 날개로 감싸 안고 도망 다닐 뿐, 끝내 암닭은 열린 문을 나서지 않았다. 닭장 문을 잡은 어머니의 손끝이 떨린다. “떠나온 걸 후회하십니까.” 청년이 신음에 가까운 소리로 묻는다.
어린 삼 남매를 모질게 떼어내고 어머니를 등 떠밀어 대문을 나서게 했던 건 청년의 할머니였다. 의처증에 시달리며 인간이기를 망각해가는 아들을 위해 마지막 선택을 하던 날, 할머니는 해가 진 십리 길을 걸어 에미를 보내야 하는 어린것들의 분유와 젖병을 사왔다. 그리고 그 병에다 긴 이별을 담았다.
암탉이 구석에서 등을 돌리고 병아리를 품고 있다. 그렁그렁한 작은 눈에 눈물과 공포를 담고 파고드는 병아리들을 살뜰히 보살피고 있다. 오직 닭장의 안녕을 위해준다는 미명하에 끝내 장닭의 격리를 거부하는 어머니를 향해 “아버지를 이해하시는군요.” 말하는 청년의 어깨가 들썩이는가 싶더니 맥없이 주저앉는다. “가장으로써 너의 아버진 성실하고 완벽 했었다.”
신음하면서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던 여인의 긴 세월. 이제는 고독한 수도생활이 뿜어내는 정결한 향기가 배어 있는 어머니의 젖은 눈이 먼 산 어디쯤 날아가고 있을 산 벚꽃 잎을 쫓고 있다. 다시 원망에서 서러움으로 바뀌느라 청년의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 모양이다.
“아버지를 위한 선택이었다.” 청년이 움찔 했다. 뜻밖이었다. 이십년이란 세월 그가 기다렸던 말은 아니었다. 먹먹했던 가슴이 마침내 통증을 일으키며 조여 오는지 움켜잡고 비틀거린다. 이윽고 청년이 돌아서 쓸쓸하게 피었다 지는 목련꽃 같은 어머니의 두 눈을 마주 본다. 향기마저 내 뿜을 수 없었던 수묵화 속의 한 송이 목련꽃 같은 어머니. 청년이 나직이 소리 내어 어머니를 부른다.
휘이 휘이 마침내 어머니가 닭장에 모이를 뿌리기 시작했다. 모이를 향해 닭들이 모여 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꾸꾸꾸 장닭이 암닭를 부른다. 어느새 앙팡진 엉덩이를 흔들며 암탉이 꼬박꼬박 조는 병아리들을 몰고 달려왔다. 장닭은 연신 암탉에게 모이를 양보하고, 모래 목욕을 즐기려는 병아리들을 위해서는 땅을 파헤친다.
4월의 허공에 눈처럼 꽃잎이 흩날린다. 산 벚꽃을 보려고 올랐던 암자에서 그만 모자(母子)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다. 닭장을 바라보는 마음이 그들만의 아픔일까. 살아있는 것들의 부대낌은 숙명이고, 격리는 또 다른 이별의 상처인 것을. 휘적휘적 청년이 사라져간 산모퉁이로 다시 긴 이별의 푸른 이내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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