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도시, 밀라노

저녁이 다되어 밀라노에 진입했다.
비가 흩뿌린 뒤라 무지개가 반원으로 선명하게 생겼다.
하룻밤을 푹 쉬고 아침 일찍 밀라노 시내로 들어와 첫 방문 코스가 스칼라 극장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고 명성에 비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극장 앞 작은 광장의 중간에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제자들과 함께 동상이 되어 스칼라 극장을 바라보고 있다.
밀라노에서 다빈치는 음악가로서도 유명하다.
바이얼린 연주가 수준급이었으며 작곡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벽화 ‘최후의 만찬’을 그린 곳이다.
이 작품은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성당에 있다.
이 작품을 제작할 때 예수의 모델이 19세 미청년이었고 6년 뒤 가롯유다의 모델로 이 도시에서 가장 포악한 사람을 뽑아서 썼는데 6년 전의 미청년이 죄를 짓고 죄수가 되어 유다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그 곳에 가서 2,000년의 시간을 넘어 같이 식사하는 느낌은 갖지 못했지만 여기서나마 다빈치의 동상을 보며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 발명가, 과학자, 천문학자이면서 음악가로서 통섭된 천재였던 그의 다른 한 면을 본다.


스칼라 극장은 입구에서 보는 전면은 평범해 보이지만 앞뒤로 길고 3,000석이 넘는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토스카니니와 풋치니, 스트라빈스키 등이 여기서 데뷔를 했고 세계적인 지휘자가 있으며 스칼라 오페라단과 스칼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상주하고 있고 관람 문화가 매우 엄격하다고 한다.
오페라의 본 고장인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권위가 있으며 많은 성악가들이 스칼라 극장에서 데뷔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스칼라 극장을 세계적인 반열에 오르게 한 토스카니니는 1957년 뉴욕에서 임종했는데 그의 유해는 이 곳 스칼라 극장 안 마당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죽어서도 스칼라 극장을 찾았던 것이다.
스칼라 극장은 항상 전석이 매진이다.
1778년에 개관하여 250년의 역사 속에서 350여 편의 오페라가 공연되었고 ‘나비부인’,‘투란도트’등이 여기서 초연 되었으며 특히 베르디의 많은 작품이 여기서 초연을 했다.

스칼라 극장 건너편에는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 갤러리아가 있다.
십자로를 중심으로 대형 백화점 4개를 합해 놓은 모습이다.
밀라노가 고향인 ‘프라다’의 1호점이 여기에 있다.
이 갤러리아는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가 이탈리아를 통일한 기념으로 만들었고 1877년에 완공된 세계 최초의 쇼핑센터이면서 스칼라 극장과 밀라노 두오모 성당 사이에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이 화려한 통로를 지나 밀라노 두오모 성당과 광장에 들어섰다.
1386년에 착공해서 500년에 걸쳐 완공한 이 성당은 높이만 107m이고 축구장 1.5배 크기이다.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규모이고 여기가 두 번째이다.
다행이 성당 앞에 넓은 광장이 있어서 성당 전체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고딕양식의 결정체라고 하는 이 성당은 그 화려함과 섬세함들이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인간의 ‘미친 존재감’을 표현한 것 같다.
내부까지 다 볼 수는 없었지만 외부만 해도 2,000여개의 성인상과 135개의 크고 작은 첨탑들이 빽빽하게 서있고 그야말로 성당 자체가 엄청난 밀도의 내공을 뿜고 있는 예술품이다. 이 성당을 보면 밀라노의 ‘프라다’가 왜 세계적인 명품이 되었는지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노래 또한 스칼라 극장을 보면 그 수준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광장에는 이탈리아를 현재의 모습으로 통일한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가 말을 타고 떡하니 버티고 있다.
호랑이가 영역 표시를 하듯이 전국에 150 여개의 동상이 있다고 한다.
근데 좀 씁쓸한 점도 있다. 통일에 공을 세운 남부의 가라빌디 장군의 동상도 함께 있어야하지 않을까. 요즘은 이 많은 동상이 하는 역할을 매스미디어가 한다.

TV같은 언론매체가 금방 통일을 알리고 정국을 수습할 수 있다.
그것도 실시간 생방송으로 할 수 있다. 이제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문명이 정보화되어 웹상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앨빈 토플러의 말대로 이‘정보’는 ‘권력’이 되어 상당수 이동했다.
소수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던 문자와 정보라는 권력이 다수의 대중에게로, 남자에서 여자로, 부모에서 자식으로, 사장단에서 노조로, 교사에서 학생으로 이동했고 이 권력은 정권을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질서를 재편하기도 한다.
네트워크가 발달해서 누구나의 손 안에 첨단의 정보가 다 있다.
이제 다수의 대중은 조각상이나 그림을 통하여 가르치고 계몽을 해서 이끌어 가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협조를 구하고 함께 해야 하는 동지가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술은 과거처럼 종교의 설명을 위해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카메라가 생겨서 사물을 그대로 옮겨야할 이유 또한 없어졌다.
세계대전을 통해서 대량 살상을 체험한 인류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근본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고 현대미술은 여기서 출발한다.

이번 탐방의 마지막 장소는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산맥의 남쪽에 위치한 코모 호수이다. 호수 주변의 전원도시이자 호반의 도시가 산허리에 걸린 구름과 더불어 환상적인 산수화같이 펼쳐져 있다. 역시 아무리 화려한 작품도 자연에 미치지 못한다. 코모호수에서 머리를 식히고 다음 여정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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