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우근

시를 쓰다 보면 우리 삶의 현상 속에서 많은 것을 반추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거대담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연 인간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시가 파편적인 삶이 파악양식이라는 것에는 깊이 공감하지만 시가 그 주변에 머물거나 경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상과 유리된 시가 제대로 된 시라고 할 수 없듯, 일상에만 집착하는 개인의 서사에만 머물러 있다면 시의 공적역할을 부정하는 한낱 사적인 고백에 불과할 것입니다.
‘일상적 혹은 세속적인 것의 장엄함’이라는 말로 한 개인의 지적경험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저는 늘 머리 속에 담고 있습니다.
무척 거창한 명제 같은데 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공유하는 삶의 소중함과 측정할 수 없는 그 가치를 조명해 보고 싶은 욕심은 시인이라면 누구든지 추구해야 할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시의 이해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시는 이해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시를 이해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이해는 논리가 필요하지만 느낌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정도에서 무시해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너무나 다양한 세계와 우주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간혹 상식을 벗어난 돌발적인 언어의 행위를 일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시적 작업의 결과물이기도 하고,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라고 정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다만 언어를 학대하고 문법을 파괴하는 행위는, 시가 언어의 사원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저 스스로 경계함은 물론 독자들도 그런 현학적인 표현에 반짝반짝 관심을 표할 수는 있어도 깊이 공감하지는 못하리라는 사실은 분명할 것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저는 말의 상징성보다는 말의 명징성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소위 지금 시단을 쓸고 있는 미래파라는, 혹은 기타 불명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많은 창작행위가 독자들에게 멀어지고, 또 스스로에게도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조금 염려스럽니다. 다만 그것은 제 문제가 아닌, 또한 그들의 고유한 영역이기 때문에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시가 세상을 암울하게 하고 혼돈으로 몰아가 그 극단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한다? 아방가르드, 다다이즘? 미래파? 가당찮은 일입니다.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 역사적 흔적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부단히 시도되고 반복되고도 있습니다. 저는 모더니즘 이후로 별다른 색채를 띤 시의 경향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념이냐, 아니냐의 차이 외에는 말입니다.

소설가 김훈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언어와 관념을 맹신하는 자들을 혐오한다. 삶의 바탕, 삶의 구체성이라는 바탕이 없이 언어를 맹신하는 자들은 삶과 세계에 대해 말한 자격이 없다.”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에 언어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도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소설과 시의 경계점에서 생기는 방법론의 차이, 그리고 전달의 방법의 차이라고 할까요. 언어의 명징성, 정확성, 본질에의 접근을 위한 감정의 배제, 간결성, 이런 방법들이 어느 정도 집합이 되어야만 하나의 시가 탄생되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일상적, 세속적인 것의 장엄함 혹은 위대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화가인 막스 빌이라는 사람의 언급이 있습니다.
“예술이란 인간정신의 표현이며,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막연한 상상을 구체적인 형태로 가시화시킨 것이다.”

인간정신의 막연한 상상의 그 최종적인 종착점은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그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실천을 통한 과정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길은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것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너무 명료하고 세속적이고 일상적이어서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눈 여겨 보지 않고 지나쳐 버립니다.

소통을 이야기하고, 인문을, 통합을, 더 나아가서는 통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시대정신을 따를 수는 없지만 또한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공동체를 위하지 않고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살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입니다. 사소하나 세속적인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위로만 더 빨리 도달하려 한다면 그 나머지의 결과는 얼마나 뻔한 삶일까요? 저는 모든 사람의 삶은 소박하고 간결하다고 생각합니다.

돈 버는 일로 대표되는 일상적인 생활은 실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거기에 꽃다발을 올려놓고, 햇살을 뿌려 주고, 바람이 불게하고, 강물이 흐르게 한다면, 더더욱 예쁜 삶이 되겠지요.
"모든 벽에는 문이 있습니다"

(이 기고는 이우근 시인의 시집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이루어진 기조강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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