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천수 시인

"시는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다" 고 말한 고종석의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 刊)’을 접하게 된 것은 1년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평소에 자주 들리는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다가 책표지 안쪽에 또박또박 써놓은 독자의 글, 몇 구절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그 독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책을 사도록 미끼로 던져놓은 글의 내용은 이렇다.


"아아, 진정 복되어라!
살아서 이 아름답고 빛나는 말의 잔치를
맛보는 일은!
고종석의 글은 진주알이다. 그의 책은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발하는
영롱한 진주목걸이다."


표지 안쪽에 적혀진 몇 줄의 문장에 낚여 구입한 책을 나는 한동안 읽지 않고 책상 위에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을 뒤적이다가 <푸줏간에 걸린 인육 - 이연주의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이라는 제목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종석이 이연주 시인의 첫 시집을 읽고 느낀 자기 나른 대로의 내면 풍경 읽기였다. 고종석은 이 시집에 대해 "시집[매음녀]를 읽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 세계는 온전한 세계가 아니라 뭉개진 세계다. 묘한 것은 그 세계가 질펀하면서도 메마르다는 것이다. [매음녀]는 늪이자 사막이다." 고 그 풍경을 소개한다.

고종석의 글을 읽는 순간 나는 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을 그녀의 유고시집 “속죄양, 유다”를 순간적으로 떠올렸고. 색이 바랜 지난날의 묵은 일기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연주 유고시집 “속죄양, 유다”를 읽는다. 1991년 작가세계 가을호 부록에 실린 시, 가족사진 외 9편을 읽고 오늘 그의 두 번째 시집을 본다. 거의 모든 시편들을 읽어 보았으나 아직 내게 잡혀오는 뚜렷한 상은 없다. 하지만 뭔가 잡힐 것만 같은 어떤 예감이 느껴진다.

평론가 이경호는 <부패한 삶의 굴헝에서 벗어나는 절망의 노래>라고 평하고 있다. 이번 시집은 죽음을 앞둔, 예상하고 있던, 실행하려 했던 그의 굴해였을까. 시집을 보기 전에 각종 신문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한, 애석하게 생각한 글들은 이렇게 그녀를 얘기하고 있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생과 사의 세계를 눈물겹게 보여준다. 썩은 세상을 정화하는 주술적 언어, 그 지엄한 시혼으로 살아남아 시인들을 일깨우고 있다.>

앞서 세상을 떠난 기형도의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에서 작고한 평론가 김현은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를 위해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고 먼저 얘기했다. 하지만 정작 이 땅에 참 시인으로 살아 있어야 할 시인들 '기형도, 박정만, 진이정, 전성규, 그리고 이연주 등' 은 먼저 가고,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시인들만 살아남아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억할 뿐이다. 언제나 이 세상은 앞선 자의 몫일까.

시인 이연주,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 삶의 흔적은 누구보다도 강하게 이 오염된 사회를 정화시킬 것이며 시인과 독자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의 삶과 시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날이 올 때, 그에 대한 많은 얘기와 글들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싶을 뿐이다. 속죄양, 유다여. 제발 신을 원망 말라."

고종석은 그녀의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을 두고 ‘푸줏간에 걸린 인육’ 이라는 이름을 달아 주었고, 이경호는 ‘부패한 삶의 굴헝에서 벗어난 절망의 노래’라는 이름을 달아 주었다.

나의 낡은 일기첩에서 18년 간이나 쉬고 있다가 다시 살방살방 걸어 나온 그녀의 시집 “속죄양, 유다”에 대해 이제는 나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름을 달아 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녀도 모르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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