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수(실바노) 계산성당 주임신부

남미여행에서 겪은 이야기다.
(부활 휴가차 신부들이 함께 떠난 남미 순례…)리우데 자네이로(예수님상이 크게 팔 벌리고 있는 도시)
안내자를 만나지 못함으로 느끼는 불안, 허탈, 상실감. 앞으로의 여정이 심하게 걱정이 되는 짧은 시간 안에서 느끼는 감정은 말로 다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내 삶의 모든 것을 맡기고자 했는데, 그래서 가족도, 생업도 포기하고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함께 하고자 했는데…. 그 스승,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제자들이 느끼는 상실감, 허탈함,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오죽했겠는가? 그 모든 요인이 제자들을 고향으로 향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루카 24, 35-48.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그러했다. 베드로는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갈련다’고 했다. 어떤 제자들은 다락방에 문 걸어 잠그고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숨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발걸음, 행동을 보고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는 모습에서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을 탓하기도 한다. 그렇게도 주님을 몰라볼 수 있을까?

함께 생활하고, 가르침을 듣고, 기적의 현장에 함께 하면서 신앙을 키워 왔는데…. 하루 종일 함께 걸으며 말씀하시는 그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실을,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다른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한다.

그나마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모습을 살며시 들여다보면 좋겠다.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분이 가신 길을 제대로 걷고자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분이 가신 길을 제대로 걷고자 고행마저 감내하는 이들도 많다.

그분의 삶을 오늘 우리의 삶 안에 다시금 드러내고자 묵묵히 각자의 삶을 반성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더 깊은 만남을 위해 여러 신심이나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이들도 있다.

외적인 발전과 기쁨의 표현을 위해 각종 행사에도 열심히 활동하는 이들이 많다. 수많은 ‘예수님 따르기’를 시도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 한 가지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말씀을 듣고 빵을 떼어 나누는 모습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는 사실이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하고, 빵의 나눔을 위해서는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낮은 자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드러내시고 열려 있는 자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도 어쩌면 우리가 가야할 신앙의 여정일 것이다.
그들은 말씀 안에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는 성찬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고 그제서야 비로소 부활을 증언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길이 있고, 많은 도움이 있기는 하지만 본질은 하나다.
말씀을 제대로 새겨듣고 성찬의 나눔에 제대로 참여할 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미사,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정하권 몬시뇰은 “신앙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왜 자신의 마음에 맞춰서 하느님을 생각하는 게 신앙이라고 여기는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개인주의가 팽배한 탓인지 마치 신앙을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나로 꽉 차면, 내 것으로 너무 많은 것을 채워 놓으면, 내 것만 고집하다 보면 하느님을 볼 수 없다.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는 생활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할 것이다. 특히 말씀과 성찬(미사)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본질이다.

그냥 몸만 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도 함께 해야 한다. 드려야할 마음, 바쳐야 할 정성도 아낌이 없어야 한다. 이유나 사정이 많으면 곤란하다. 그래야,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날 수 있고,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부활을 전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일만으로도 우리는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제대로 느끼고, 체험하고, 나누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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