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의 고대 국가, 이서국의 탄생

▲ 청도군 풍각면 성곡리 작업 광경
한반도의 철기 문화는 화려했다.
청동기 문화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면서 비파형동검은 세형동검으로, 거친무늬거울은 잔무늬거울로 바뀐다. 이때 세형동검 등을 제작했던 ‘거푸집’이 만들어진다. 거푸집은 우리나라에서 철기 시대에 청동기 유물이 직접 제작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철기문화 발전과 확산 양상은 동아시아의 고대제국 형성과 확대, 주변의 2차 국가 성립 문제와 직결돼 있어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철기는 기원전 5세기부터 중국을 통해 고조선 지역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철기 초창기에는 청동기와 함께 쓰였는데, 기원전 1세기경에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널리 사용됐다.
철은 청동기보다 훨씬 단단하며 날카롭다. 원료인 철광석은 구리보다 풍부해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철은 무기는 물론이고 생활 도구인 농기구에도 널리 쓰이면서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업 생산력이 크게 높아졌다. 철기 시대에는 인구가 늘고 정착 생활의 규모도 확대됐다.

철기 시대에 도래하면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별이 뚜렷해졌다. 지배층은 정치와 군사 활동 및 제사 의식을 맡았고, 피지배층은 생산 활동을 담당했다.
철로 만든 창이나 칼과 같은 무기를 전투에 사용하게 되면서 전투력이 크게 향상됐고 부족 간의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철을 잘 이용한 부족은 세력을 키워 국가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철기를 기반으로 성립된 크고 작은 국가는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주변지역과 교류하면서 성장해 나갔다.

이서국(伊西國)은 신라(新羅)의 모체인 사로국(斯盧國)을 위협할 만큼 강했다.
가야국을 설립한 김수로왕이 이서국의 출신이었다는 설, 고조선을 이어 천제를 받들었던 설 등 이서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용맹스러운 나라, 이서국의 실체를 알아본다.

◇ 자연 지리적 특성
경상도 지역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맞닿아 있으며 내륙은 백두대간에 의해 한반도의 중북부지역과 나누어지므로 흔히 영남이라고도 부른다. 강원도 함백산에서 시작하여 남해로 들어가는 장장 520여 km의 낙동강은 그 유역의 면적이 남한의 약 ¼에 해당 될 만큼 많은 분지와 퇴적평야를 이루고 있어 ‘영남의 젖줄’이라고 한다. 이 지역의 안동을 비롯한 밀양, 영덕 등지에서 구석기유물이 발견된 것을 보면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대륙으로부터 금속문화가 유입되면서 급속한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서력기원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서 여러 개의 작은 정치집단들이 형성되었다.

청도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유적과 유물로는 신석기 시대 유적인 오진리 바위그늘 유적을 들 수 있다. 화살촉, 도끼 등을 비롯한 석기와 백합, 떡조개 등의 바다조개가 출토됐는데, 바다조개가 출토된 것은 해안지방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범곡리, 송읍리, 진라리 등 청도 전역에 32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대규모 취락 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에는 인근 지역에 비해 우세한 소국 형성의 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기반 아래에 형성된 이서국은 신라를 직접 공격할 정도로 강력한 나라였지만 군사적 요충지이자 가야진출 통로라는 중요성 때문에 주변의 다른 나라보다 일찍 멸망했다.

◇ 진한(辰韓)의 형성
한반도의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은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3세기경까지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 형성돼 있던 여러 정치 집단이다. 진한(辰韓)의 맹주는 경주 사로국(斯盧國)이며, 12개의 소국(小國)으로 구성됐다. 진한과 변한의 각 소국은 마한에 비하여 규모가 작은 것이 많아 큰 것은 4천∼5천 가(家), 작은 것은 600∼700가(家) 정도가 됐다.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전에는 진한 형성의 주체와 관련해 서로 다른 내용이 실려 있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삼국지’에는 진한만이 옛 진국(辰國)이라고 기록돼 있으나 ‘후한서’ 동이전에는 삼한 모두가 옛 진국이라고 돼 있다.

진국을 남한 전역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후한서’의 기록을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삼국지’의 기록에 대한 긍정적 해석을 시도하는 입장에서는 진국을 마한지역에 있던 특정 소국으로 규정하고 한강 유역에 있던 진국 또는 전라북도 익산 부근에 있던 진국이 경상도지역으로 이주하여 진한 형성의 주체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진국 자체의 성격에 아직 많은 의문점이 있기는 하지만, 진국을 서기전 3∼2세기 경 중남부 지역에 성립되어 있었던 유력한 세력 집단으로 간주한다면, 진국의 존재는 이 단계의 청동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는 마한지역으로 설정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고고학 자료를 놓고 볼 때, 진국의 존재를 경상도 방면에서 찾고 이를 진한과 관련시킬 근거는 아직 희박한 듯하다.

진한 형성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은, 이른바 ‘진역(秦役)’을 피해 한지(韓地)에 이주한 중국 전국계(戰國系) 유민이 마한의 동쪽 땅을 분할받아 진한을 형성했고 초기에는 6국이었으나 점차 12국으로 나누어졌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불합리한 전승으로, 고조선 유민 또는 온조(溫祚) 집단의 남주 정착 과정을 반영하는 기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마한 지역과는 달리 경상도 지방에서는 전체적으로 위씨조선계(衛氏朝鮮系) 청동기·철기문화의 유입, 한(漢) 철기문화의 보급에 수반한 금속제 유물의 수량이 현저하게 증가된다.

다량의 금속기를 소유한 지배자의 출현은 정치집단의 대두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진한 소국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경주·대구 지역에서는 위씨조선계 금속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다량의 청동기·철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같은 고고학 자료를 놓고 본다면 혁거세(赫居世) 집단의 대두와 6촌(六村) 통합에 관한 문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위씨조선계 주민과 문화의 유입을 계기로 청동기문화 단계의 토착 세력 집단들이 다수 통합되면서 ‘삼국지’의 진한사로국으로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청동기· 철기 교역을 통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던 일정한 세력권을 상정하고, 이를 진한 소국 연맹체 형성의 실마리로 간주한다면, 진(秦)의 망명인들이 진한 형성의 주체가 됐다는 ‘삼국지’의 기록도, 넓은 의미에서 위씨조선계 유민의 경상도 방면 이주와 이에 따른 이 지역의 정치·경제적 변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소국 연맹체로서 진한의 실체가 확립되는 것은 이 단계부터 내재하던 경주·대구 중심의 세력 토대가 12국으로 확대 발전되고 사로국 중심의 정치적·경제적인 종연맹조직이 성립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위략(魏略)’의 기사에 나오는 왕망(王莽) 지황연간(地皇年間, 20∼30)에 낙랑군에 조공하였다는 진한 우거수(右渠帥) 염사치(廉斯鑡)는, 12개 소국 연맹체로서의 진한이 아니라 경주·대구 세력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유력한 소국의 신지(臣智)로 간주된다.

‘진서(晉書)’에 의하면 진한 소국 연맹체는 서기 280년, 281년, 286년 세 차례에 걸쳐 ‘진한’의 이름으로 중국 진(晉)에 견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원거리 교역의 실시는 진한 소국 연맹체의 결속력과 조직력이 3세기 말경에는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진한의 이름으로 대외통교를 전개하고 있던 진한 소국의 대부분은 신라 국가의 기본세력으로 편제되어갔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창녕의 소국(불사국 또는 난미리미동국에 비정됨)과 같이 3, 4세기 이후 진한 연맹체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가야 소국으로 발전한 것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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