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이서국(伊西國)의 기록들

▲ 각종 철기류
◇ 이서국(伊西國)의 기개
영남의 중심에 위치한 청도군은 동으로 경주시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로 경상남도 창녕군, 남으로 경상남도 밀양시, 북으로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경북도 경산시·영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청도의 산은 동으로 운문산(1,188m), 서로는 비슬산(1,084m), 남으로 화악산(932m), 북으로 용각산(692.5m) 등 사방으로 험준한 산이 인근의 다른 지역과 경계를 이루면서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험준한 산세는 이서국(伊西國)이라는 강력한 부족 국가를 형성시킨 요인이 됐다. 이들 산마다 자리 잡은 사찰은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장소로써 지역민들에게 자부심과 정신적인 안정을 줬다.
오랜 세월 풍토와 관습에 의해 해당 지역이 지니는 독특한 특성을 지역 정체성이라고 한다.
청도만이 가진 독특한 특성은 무엇일까. 각종 지리지마다 ‘풍속은 검솔함을 숭상했다’고 돼 있어 검소하고 솔직한 것이 청도 사람의 특징임을 알 수 있다.

청도는 ‘고을에 큰 성씨가 많아 다스리기 어렵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옛날부터 토착 세력이 강해 수령들이 파견돼도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고려 때 대표적 토착 세력인 청도 김씨의 경우 김지대(金之岱)의 뒤를 이어 그 후손인 김선장과 김한귀 등의 벼슬이 계속 이어져 이들 청도 김씨에 의해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될만큼 세력이 아주 강했다. 청도 백씨 또한 밀양의 도적이 청도를 습격했을 때 백계영 형제들이 군민을 동원하여 섬멸할 정도였으니, 토착 세력들이 매우 강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질은 토착 세력들이 위세를 떨치던 고려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신라는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막았으나 오랫동안 저항 할 수가 없었다. 연히 이상한 군대가 와서 도왔는데, 그들은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으며, 신라 군사와 힘을 합쳐 적을 격파했다.”

청도는 삼국시대 이전에 신라의 주변 국가 중 유일하게 신라를 위협해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이서국이 자리했던 곳이다. 기록에는 이서국이 먼저 신라를 공격했다고 돼 있지만, 신라가 외부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이서국을 정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는 험난한 지세와 청동기 시대에 형성된 기반을 믿고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이서국을 항복시킨 후(유리왕 19년, 42년), 토착 세력을 통한 간접 지배 방식을 실시하지 않고 직접 지배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직접지배 방식에 불만을 가졌던 이서국의 토착 세력들이 기회를 보다가 유례왕 14년(297년)에 신라의 금성을 침공한 것으로 파악된다. 청도 선비들과 청도의 백성들에게서 나타나는 굳세고 강건한 무인적인 기질의 근원은 바로 이서국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 이서국(伊西國)의 문헌 기록
청도 지역에는 고대에 이서국(伊西國)이 존재한 것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의 역사 기록에 전해져 오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신라의 전신이었던 사로국과 금관가야를 비롯한 6가야 등 약 20여 소국이 존재했다. 이서국은 기원 1∼3세기경에 영남 지역에 존재하였던 삼한 중 진한의 소국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상당한 수준의 세력을 가진 정치 집단으로 평가된다. 3세기 중엽에 편찬된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東夷傳)에는 진ㆍ변한이라 하여 소국들의 성격과 사회상 등 구체적인 당시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도 단편적이나마 이들 소국에 관한 기사가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학계의 불신으로 연구의 한계도 있지만 최근 고고학 연구에 의해 구체성을 띠며 새로이 검토되고 있다.

이서국의 명칭은 '삼국지'에는 보이지 않으며 국내 최고의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서국에 관한 역사 기록은 '삼국사기'에 이서국의 잔존 세력이 신라 금성을 공격한 내용이 전해지고, '삼국유사'에는 이서국의 위치, 이서국의 멸망, 죽엽군의 설화가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이서국의 금성 공격과 죽엽군의 기록을 통해서 이서국의 존재와 그 세력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으며, 아울러 사로국의 성장에 따른 주변 소국들의 병합 사실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신라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이서국에 관한 문헌 자료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들 수 있으며, 후대의 지리지에도 단편적인 내용들이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례이사금 14년 조[서기 297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 伊西古國來攻金城 我大擧兵防禦 不能攘 忽有異兵來 其數不可 勝紀人皆珥竹葉 與我軍同擊賊破之 後不知其所歸 人或見竹葉數萬 積於竹長陵由是國人謂 先王以陰兵助戰也 ……”

[이서고국에서 금성을 공격하므로 대병을 일으켜 방어하였으나 쉽게 물리치지 못하고 있던 차 갑자기 다른 군사가 몰려오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으며 사람마다 머리에 대나무 잎을 꽂았다. 그 군사가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쳐부수고서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으며 혹자는 단지 대나무 잎 수만이 죽장릉에 쌓인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선왕께서 신병을 보내어 싸움을 도운 것이라고 일렀다.] 이 기록에 의하면 옛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한 사실과, 신라가 죽엽군의 도움 없이는 쉽게 방어하지 못할 정도로 이서국의 군사력이 강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국유사’ 기이 편에는 각각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전하고 있다.
“弩禮王十四年 伊西國人來攻金城 按雲門寺古傳諸寺納田記云 貞觀六年壬辰 伊西郡 今郚村零味寺納田 則今郚村今靑道地則淸道郡 古伊西郡(券一 伊西國條)”

[노례왕 14년에 이서국 사람이 와서 금성을 쳤다. 운문사에 예부터 전해 오는 '제씨 납전기'를 보면 정관 6년 임진에 이서군의 금오촌 영미사가 밭을 바쳤다 하였으니 금오촌은 지금 청도 땅이며 청도는 즉, 옛 이서군이다.(권1 이서국 조)]

“…… 改定六部號 仍賜六姓 始作兜率歌 有嗟辭 詞腦格 始製黎耕及蘠永庫 作車乘 建虎(武)十八年 伐伊西國滅之 是年高麗兵來侵(券一 第三 弩禮王條)”

[6부의 이름을 개정하고 또 6성을 하사하고 비로소 도솔가를 지었는데 유차사와 사뇌격이 있었다. 여경과 장빙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호(무) 18년에 이서국을 쳐서 멸망하였고 이 해에 고구려병이 와서 침범하였다.(권1 제3 노례왕 조)]

“…… 第十四儒理王代 伊西國人來攻金城我大擧兵防禦 久不能抗 忽有異兵來助 皆珥竹葉 與我軍竝力擊賊破之軍退後不知其所歸 但見竹葉積於未鄒王陵前 乃知先王陰 騭有功 因號竹現陵(券一 未鄒王竹葉軍條)”

[제14대 유리왕 때에 이서국 사람이 와서 금성을 공격하니 우리도 크게 병사를 모아 막았으나 오래 지탱하기 어려웠다.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와서 우리를 돕는데 모두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아군과 힘을 모아 적을 격파하였다. 군사가 물러간 후에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비로소 선왕의 음조의 공인 줄 알고 이로 인하여 죽현릉이라고 불렀다.(권1 미추왕 죽엽군 조)]

‘삼국유사’ 기사에는 이서국의 위치, 이서국의 멸망, 죽엽군의 설화 등 구체적인 내용이 전하고 있다. 특히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미추왕 죽엽군 조 기사에는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낯선 군사의 출현으로 적을 물리쳤으며 이는 미추왕의 숨은 도움이었다는 설화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 이서국이 상당한 수준의 세력을 가진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3대 노례왕 14년[서기 37년]의 표기는 착오에 의한 것으로서, 대체로 3세기 후엽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제시돼 있다.

◇ 흥미로운 이서국 이야기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 고대 역사서에 남겨진 이서의 이야기는 자칫 전설처럼 여겨질 수도 있으나,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이서국의 역사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도에는 고대에 이서국이라는 소국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이서국의 도읍지가 어디였는지, 그 세력은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증과 관심이 더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서국의 고지가 청도라는 사실은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오늘날 청도 산서 지방인 청도읍·화양읍·이서면 일대로 추정된다. 이서국의 도읍지 또한 청도군 화양읍과 이서면의 경계가 되는 토평 2리의 백곡 마을로 알려졌다. 이곳에는 백곡토성과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그리 멀지않은 곳에 이서산성이 자리 잡아 전초 기지의 역할을 수행했음도 알 수 있다.

이서국은 신라 초기에 금성을 공격할 정도의 유력한 집단으로 역사에 그 실체를 보여 주고 있으며, 신라의 죽엽군 설화에 보이듯이 이서국의 군사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서국의 존속 시기는 원삼국 시대인 기원전 1세기경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청도 분지에서 신라·가야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고고학 자료인 4세기 무렵의 고식 도질 토기가 소라리, 봉기리 등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5세기 이후에 신라 토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점으로 보아 이서국은 5세기 이전까지 그 세력이 유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도의 이서국은 삼한 소국의 하나로서 역사 기록에 어렴풋이 남아 있지만,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청도천을 따라 열을 지어 분포하고 대규모 마을 유적에서 민무늬 토기와 돌검들이 발굴되는 것을 볼 때 청도에는 오래 전부터 이서국의 문화적 기반이 구축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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