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이서국과 관련된 설화

◇ 이서국(伊西國)의 풀어 읽는 재미있는 설화
▲ 미추왕과 죽엽군
석달해가 신라의 역사를 새 물결로 바꾸기 위해 나라 이름을 계림으로 바꾸고, 역사변혁의 상징인 도깨비혁명을 시도하려고 김알지를 출현시켰다. 김알지를 내세운 부족은 석달해와 더불어 신라에 입성한 해씨의 추종자들이었으니 단군 왕족의 친위대나 다름이 없었다. 미추는 김알지의 6대손이다.

석달해는 제4대 임금이 됐고, 그의 후손은 제9대~제12대로 이어졌다. 제12대인 점해 이사금은 제11대 조분왕의 아우로 대를 이었는데 제11대의 사위인 미추에게 왕위를 넘김으로써 신라 역사상 첫 김씨 임금이 출현하게 됐다. 역대 김씨 임금들은 미추왕을 김알지 못지않게 시조왕으로 추앙하게 됐다.

신라의 초기에는 석씨와 김알지가 한 세력이었다. 석달해의 정치적 지혜로 태어난 김알지의 후손들이 날로 번창함으로써 김씨 부족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임금의 사위로 왕실에 발을 들여 놓은 김미추는 화백회의의 지지를 받아 제13대 임금으로 추대됐다. 그러나 제11대 임금에겐 왕자가 있었기 때문에 왕권이 사위에게 넘어간 것을 매우 불만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미추왕은 큰처남인 왕자세력과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됐다.

왕가일족의 지지를 받고 있는 유례와 외세를 업고 있는 김미추의 대립은 석씨일가와 김씨일가의 대립이 됐다. 그러나 미추왕은 22년 동안이나 왕업을 이어가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동안 대립관계에 있던 두 세력은 미추왕 15년 2월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부터 왕위를 놓고 대립했던 유례왕자와 매제인 미추왕은 15년간이나 버티고 앉아 천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미추가 끄덕없이 15년을 지켜 앉은 것이었다. 유례는 그의 자리를 들썩거리게 해 기운을 약화시키고 그가 떠있을 때 밀어내려는 술책을 꾸몄다. 미추왕은 궁실을 그대로 지켜 가려고 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궁궐개작공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안정된 정세를 흔들어 큰 공사를 일으킴으로써 국력을 누출시키면 외세의 침략을 면할 수가 없다고 맞섰다. 대궐공사는 절대로 필요했지만, 공사로 인한 목적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양측의 논쟁으로 번질 수밖에 없었다. 왕의 권위는 흔들리고 왕권과 신료들의 대권인 화백회의가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추왕은 끝내 허락하지 않고 7년을 견디다가 죽었는데, 지속적으로 신라발전론을 주장한 유례왕자가 당연히 대를 잇게 됐다. 그러나 이미 늙었기에 유례왕이라고 부르게 됐다. 유례는 당시 늙은이(老)라는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김알지의 6대손이 왕위에 올랐으나 4대에 연속된 석달해의 왕손들을 밀어낼 기력이 약했다. 왕위는 다시 석씨인 유례에게로 넘겨지게 돼 왕실은 다시 석씨와 김씨간의 알력이 생기게 됐다.

유례왕이 왕위에 오른 지 14년이 되던 해에 청도지역에 있던 이서국(伊西國)이 국력을 다 기울여 신라를 쳐들어왔다. 신라는 나라를 내놓고 덤비는 이서국의 결사대를 견제할 용기와 능력이 없었다. 전쟁은 백중지세로 세월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원정군이 나타나 신라를 돕기 시작했는데, 모두 대나무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어찌나 날쌔고 용감했던지 이서국의 병졸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이것을 본 신라군들이 용기 백배해 이서국까지 밀고 들어가 마침내 이서국을 멸망시키고 국토를 넓히게 됐다.

전쟁이 끝날 무렵 원정군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서 그런 훌륭한 장수들이 왔으며 또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 흔적을 찾아 나선 병사들의 발길이 미추왕의 무덤 앞에 이르렀을 때 모두 엎드려 절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미추왕이 죽었을 때 대나무가 많은 곳에 터를 잡아 봉분을 만들었었다. 미추왕의 무덤 앞에 댓잎이 무수히 떨어져 있었다. 필시 귀에 댓잎을 꽂고 나타났던 원정군들의 것임에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죽어서까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병사를 보내준 미추왕의 무덤 앞에서 병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그곳을 죽현릉(竹現陵)이라고 부르게 됐다. 이것이 신라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호국설화(護國說話)가 됐다.

미추왕이 내보낸 죽엽군(竹葉軍)의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번져가기 시작했다.

죽엽군은 미추왕을 지지한던 김씨 부족이 숨겨놓은 군사이며 미추왕의 후손들은 변화무쌍한 날쌘 죽엽군을 몰래 숨겨 놓았으니 언젠가는 왕위를 찬탈하려고 나타날 것이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백성이 미추왕을 추모하기 때문에 유례왕의 친위부대가 죽엽군으로 변장해서 나타났다고 보기도 했다.

신라는 죽엽군의 출전으로 막강한 이서국을 물리쳤고, 호국설화를 남김으로써 훗날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호국룡설화와 만파식적의 설화가 만들어지게 됐다.

▲ 설화를 낳은 설화
만파식적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았고, 실물을 모든 백성에게 확인시켜줄 수도 없었다. 항간에서는 만파식적의 실존과 영험을 믿지 않으려고 했다.

신문왕이 죽고 효소왕이 즉위했다.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받아온 검은 옥대가 수많은 용으로 만들어졌음을 확인시켰던 바로 그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그해 단기 3025년 (서기692) 9월 7일 부례량을 국선(國仙)으로 삼아 화랑도(花郞徒)를 모았는데 그 무리가 무려 천여 명에 달했다.
다음해 3월에 부례량은 낭도들을 거느리고 북쪽 변방으로 나가 훈련을 하다가 갑자기 말갈인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모두 도망치고 부례량과 그의 친구인 안상만이 붙들려 가게 되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효소왕은 낙심이 컸다.

그런데 왕실의 창고 위에는 신비스런 기운이 떠돈다는 말이 전해왔다. 왕은 사람을 시켜 창고 안을 검사하도록 했는데, 그 신령한 피리와 거문고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왕은 창고지기 관원을 가두게 했다. 김정고 등 다섯 명이 옥에 갇히게 됐고, 즉시 어명을 내려 “거문고와 피리를 찾아오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알렸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그때서야 만파식적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하고 만파식적을 찾을 수 있도록 빌었다.

이때 부례량의 부모는 백률사의 대비상(관음상) 앞에서 여러 날 째 저녁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5월 보름날이 됐다. 열심히 기도를 드리다가 관세음보살을 우러러보니 어느 틈엔가 탁자 위에 피리와 거문고가 놓여 있었다. 관음상 뒤에는 부례랑과 안상이 나란히 서 있었다.

잡혀간 부례랑은 목동이 돼 들에 방목을 하는데, 단정한 모습의 스님이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찾아 왔다. 스님을 따라 바닷가로 갔더니 그곳에 안상이 있었다. 스님은 피리를 두 쪽으로 쪼개어 각각 하나씩 주며 피리 위에 올라서라고 했다. 스님은 거문고를 타고 그들이 피리를 타는 순간, 이곳으로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부례랑의 부모는 이 일을 급히 왕에게 보고를 했다. 부례랑은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대궐로 갔다. 그는 백률사에 시주하는 것이 보은의 방법이라 했다.

효소왕은 백률사에 많은 보배와 전답을 시주해 관음보살의 영험에 대해 보은을 했다. 왕은 부례랑과 안상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고 부례랑의 부모에게도 많은 상을 내렸다. 무엇보다도 큰 상은 백성의 몫이었다. 다섯 명의 관원을 석방하고 모든 백성에게 3년간의 세금을 면제하는 상을 내렸다.

효소왕은 즉위하는 즉시 만파식적이 실제로 있음을 확인시켰고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으로 다시 찾았으며, 그것은 백성의 충절에 의한 것이었음을 천명함으로써 왕권과 국력을 안정시켰던 것이다.

그해 6월 12일과 17일에 신라의 동쪽에 혜성이 나타났다.
일관이 혜성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피리와 거문고에게 벼슬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왕은 만파식적의 위력은 몇 만 배로 늘어났으니 만만파파식적이라 추앙해 부르고, 그 뒤로는 혜성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문무왕이 호국룡이 되고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만들었다. 효소왕이 다시 만파식적을 찾음으로써 신라의 역사는 제36대 혜공왕(惠恭王)에 이르러 혼란이 시작됐다. 혜공왕은 태종 무열왕의 직계손으로는 마지막 왕이 됐다. 그는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왕태후가 섭정을 해야 했다. 수많은 왕족들이 패거리를 만들어 정권에 도전해 옴으로써 16년간의 재위 동안은 반란과 혼란의 시기로 점칠돼 있었다.

혜공왕 15년, 또 하나의 호국설화가 전해진다.

그해 4월 회오리바람이 일어 김유신 장군의 묘를 감쌌다. 회오리 바람 속에는 준마를 탄 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는데 김유신 장군의 모습과 흡사했다. 회오리 바람을 몰고 장군이 달려가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여 명 가량의 장수들이 그 뒤를 따라 질주했다. 그들의 모습은 회오리바람에 쌓여 마치 병마가 일으키는 흙바람과도 같았다. 그들은 미추왕의 무덤인 죽현릉(竹現陵)을 휘어감고 돌다가 모두 그 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죽현릉은 미추왕의 무덤이다. 이서국(伊西國)의 병사들이 서라벌을 침공해 와서 대적할 때, 귓머리에 대나무잎을 꽂은 죽엽군이 나타나서 적군을 무찌르고 모두 미추왕의 능 안으로 사라졌으며, 그들이 사용했던 댓잎이 무덤 안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능을 죽현릉이라고 부르게 됐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호국신이 된 미추왕에게 김유신과 그의 장수 영혼들이 찾아간 것이다. 미추왕은 김알지의 6대손으로 김씨로서는 처음으로 왕이 돼 시조로 추앙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김씨 계통의 임금들은 미추왕의 위력을 등에 업으려고 했다.

김유신과 장수들이 죽현릉 안으로 들어가자 땅이 진동해 슬피 우는 소리를 냈다. 김유신의 혼령이 나랏일에 마음을 쓰지 않도록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세 번이나 간청했으나 미추왕의 혼령도 계속 거절하고 타이르매, 회오리바람은 다시 돌아가 김유신 장군의 묘에서 사라졌다.

이 말을 전해들은 혜공왕은 김유신 공이나 미추왕에게 경배를 올려야만 했다. 백성들은 명산대찰을 찾아가 두 성인의 제를 모셨다. 위태로운 정세에 나라를 위하면 대대손손 영화를 누리게 되리라는 칙명이기도 했다.

조정은 귀족회의 의장인 상대등에 김양상(金良相)이 추대돼 있었는데, 이미 정권을 장악하고 왕은 이름뿐이었음을 백성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설화는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백성의 가슴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이듬해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서 김양상의 무리를 내쫓고 나라의 기강을 올바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김양상에게 진압됨으로써 그의 세력은 하늘을 찔렀다. 진압과정에서 혜공왕과 왕비가 살해를 당했기 때문에 김양상이 왕으로 추대돼 제37대 선덕왕이 됐고, 그가 맡았던 상대등의 후임으로 혜공왕의 심복인 김경신이 임명됨으로써 난국은 평정되기에 이르렀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