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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답사 여행①] 교토(京都)의 사사(寺社)들, 그 역사 속으로이부용 문화기획팀장
   
 

일본은 역사적으로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다. 오랜 시간을 문화 교류와 전쟁 등을 통해 애증관계를 형성해 왔다. 먼저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사와 사찰을 살펴봐야 한다. 신사와 사찰은 정치의 장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서민들의 생활과도 맥을 같이 하며 오늘날 일본 문화의 밑바탕이 됐다.

일본은 국가 최고 통치자를 일본 천황으로 하던 군주제 국가였다. 일본의 천황은 교토에 살면서 일본을 다스렸다. 천황은 점차 명목상의 존재가 됐고 실질적으로는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일본을 통치하게 됐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3년에 지금의 도쿄에 에도 막부를 세웠습니다. 에도 막부가 있었던 시대를 에도 시대(1603-1867)라고 하며, 에도 시대 동안에 일본 천황은 여전히 교토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국가의 통치 권한은 에도 막부의 수장인 도쿠가와 쇼군이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에도 막부가 있었던 장소인 도쿄가 실질적인 일본의 수도의 역할을 하게 됐다. 1868년에는 메이지 유신으로 국가의 통치 권한을 다시 천황이 갖게 되면서 교토에 살던 천황이 도쿄로 이주했다. 일본의 수도가 교토에서 도쿄로 바뀐 공식 이유는 천황이 교토에서 도쿄로 거주지를 옮겼기 때문이다. 도쿄가 실질적인 수도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어 새로운 수도에 적합했다는 것이다.

지난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국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일본언어문화학과 졸업생과 재학생, 그리고 이영 교수와 함께 교토 답사를 진행했다.

이번 답사에서는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여러 사사(寺社)를 둘러봤다.

일본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794년 간무천황에 의해 교토가 일본의 수도가 된다. 간무천황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권력구조를 창출하고자 했다. 불교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사찰을 건립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사찰이 거의 없었고, 한국에서는 ‘청수사’라고 널리 알려진 ‘기요미즈테라’(淸水寺)만이 존재했다. 간무천황은 헤이안쿄에 ‘동사’와 ‘서사’를 건립했는데 현재는 ‘동사’만 남아있다.

헤이안 시대 전기에 간무천황은 당나라 견당사를 보내어 선진 문화를 받아들였다. 불교계에서도 사이초나 구카이 등 승려들이 중국에서 천태종과 밀교를 배워 왔다. 구카이는 관사였던 동사를 밀교사찰로 육성시켰다. 밀교에서는 불상이나 불화를 만들 때 부처님의 모습을 예배 대상으로 하며 신비한 힘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밀교 세계관을 표현한 만다라를 그리기도 했다.

헤이안 시대 후기부터는 귀족가문인 후지와라씨가 황실과 외척관계를 맺어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세력을 휘두르는 귀족정치가 이뤄졌다. 894년에는 견당사가 폐지되고 국풍문화가 탄생한다. 10세기에는 일본 문자인 가타가나가 정형화돼 일본인 특유의 감성을 전달하는 국문학이 발달한다. 헤이안 시대 중기 11세기 초에 여류작가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가 왕조귀족들의 사랑과 인간계를 풍부한 상상력과 아름다운 문체로 그린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는 일본인의 기본 정서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건축에서는 신덴즈쿠리(寢殿造)가 만들어지고 건물 안에는 후스마에나 야마토에가 그려진다. 정토교가 유행하면서 이와 관련된 미술품이 만들어졌는데 우지(宇治)에 있는 뵤도인(平等院)이 대표적인 건물이다.

뵤도인의 본존인 아미타여래상은 최초로 ‘요세기즈쿠리’(寄木造)라는 일본 특유의 목조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여러 조각의 나무를 이어 모아 만든 것으로, 이 기법은 불상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더욱 각광을 받게 됐다. 특히 대형 불상을 단시일 내에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그 다음 카마쿠라(鎌倉)시대에 크게 유행하게 됐다.

이부용 기자  queennn@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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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일본언어문화학과 단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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