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특집
[경북 역사 여행] 철의 도시 '이서국'④ 이서국의 유적과 유물
   
▲ 유적 전경- 항공 사진
◇ 이서국(伊西國)의 위치와 도읍
‘삼국유사’의 이서국 조에는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신라 선덕 여왕 즉위년인 632년]에 이서군 금오촌의 영미사에서 운문사에 납전을 하였는데, 금오촌은 지금의 청도군 땅이며 청도군은 옛 이서군이었다.”라고 한다. 이로 미루어 이서국이 멸망한 뒤에도 선덕 여왕 대에 이르기까지 청도 지역이 이서군으로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서국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청도 지역으로 보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다.

그리고 이서국에는 중심 세력이 되는 3성[현]이 있었으며, 이들은 솔이산성(率伊山城)[소산현(蘇山縣)], 경산성(驚山城)[가산현(笳山縣)], 오도산성(烏刀山城)[또는 오악(烏岳)·오구(烏丘)·오례(烏禮)·오혜(烏惠)]의 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3성[현]의 위치와 관련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도군 고적 조를 보면 폐성(吠城)을 둘러싼 전쟁 설화가 있는데, 이는 이서국과 신라의 전쟁 가운데서 생겨난 설화로서 폐성이 이서국의 주요 산성임을 알 수 있다. 또, ‘오산지(鰲山誌)’에는 폐성을 이서산성이라 전하고 있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 청도 고읍 조에서는 폐성이 형산현이며 이서국의 옛터라 하였다. 이로 미루어 폐성은 이서산성으로 가산현[형산현]에 해당되고, 솔이산성은 매전면 일대, 오도산성은 유천 북쪽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이서국의 옛 영토가 청도 지역이라는 것과 이서국의 중심을 이루던 3성[현]의 위치는 밝혀졌으나 이서국의 도읍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전하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1832년에 간행된 ‘청도군 읍지’ 고적 조를 보면 이서고성은 군의 북쪽 10리에 있으며 4면이 모두 토축으로 주위가 일천여 척이며 이곳을 이서 고지라 전한다고 했다. 1942년 조선 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서도 이서면 토평리를 이서국의 읍지라 했다. 이러한 기록에 근거하여 백곡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토평리 백곡 마을을 유력한 이서국의 도읍 후보지로 볼 수 있다. 이는 고토성과 고분군의 분포 및 청도천과 넓은 들판의 존재로 보아 고고학적 관점에서도 상당히 가능성이 높으며, 이에 더하여 폐성[이서산성]은 이서국의 도읍을 방어하는 중요한 전초 기지로 볼 수 있다.

◇ 이서국(伊西國)의 터전
청도군의 지역적 특성과 유적의 분포를 보면, 현재의 청도천 유역의 화양읍과 이서면, 동창천 유역의 매전면 등 세 지역이 일찍부터 취락을 형성하였으며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서국의 중심세력으로 전해지고 있는 솔이산성은 매전면 일대로, 가산현은 폐성ㆍ견성이라 전해지는 화양읍 소라리로 비정함에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다만 오도산성은 문헌마다 명칭이 다르게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의 유천 북쪽 해발 약 500m 지점의 오리산성(오혜사성)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곳은 앞의 두 지역처럼 일찍부터 집단취락지가 형성되어 이서국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고 할 근거가 희박하다.

사로국이 이서국을 병합한 후 밀양을 거쳐 낙동강 하류 방면과 창녕을 거쳐 고령 방면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전초기지였으며, 그 후에도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구도성ㆍ대성이라 불리었고 나아가 원래의 대성군과 혼돈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서국의 성지에 대해서는 김정호도 ‘삼국사기’ 지리지의 대성군이 청도가 아니라 형산(폐성, 견성)이라 하였으며, 폐성의 유래를 신라 유리왕의 이서국 침공 때의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 ‘오산지’에도 폐성이 바로 이서산성이라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화양읍 소라리의 폐성지는 주구형상을 한 용각산 지맥의 돌출부분으로 ‘자연암석 위에 주위 1km 미만의 토성이 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이서국의 고지라 추정하기에는 망설여진다.

그런데 1832년 간행된 ‘청도군 읍지’ 고적조를 보면 이서고성은 ‘군의 북쪽 10리에 있으며 4면이 모두 토성으로 주위가 일천여척이며 이 곳을 이서고지라 전한다.’고 하였으며,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도 이서면 토평리를 이서국의 고지라 지적하였다.

현재의 토평리는 행정구역상 화양읍에 속하며 서쪽으로는 이서면 학산리와 접하고 있다. 토평리의 ‘와촌’에서 ‘둔직’까지는 화양읍과 이서면의 경계선인 약 2km의 구릉이 길게 뻗어 있으며, 다시 류등리의 ‘짐터’까지 이어지면서 커다란 반월 모양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반면 남쪽은 청도천까지 토평이란 명칭처럼 넓은 평지가 전개되며 서쪽의 이서면 학성리, 서원리와 연결되어 군내에서 가장 넓은 들판을 형성하고 있다.

토평리의 동ㆍ서ㆍ북을 연결하는 반월형의 구릉에 백곡토성의 흔적이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민가와 경작지로 변하여 유물의 채취도 불가하며 서쪽에 인접한 구라리 일대에서만 많은 토기편들이 채집된다.

한편 성지 북편의 자연부락인 ‘둔직’은 이서국의 왕성을 지키기 위한 군대가 주둔하였던 곳에서 비롯되었으며, ‘근바위’, ‘근방우’의 명칭도 이서국의 서쪽 왕성을 지키는 곳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서국의 고지는 현재 화양읍 토평리 백곡마을을 중심으로 반월의 지형을 갖춘 곳에 비정하며, 종래 ‘이서국기’라 하였던 화양읍 소라리의 폐성지(대성, 이서산성)는 이서국성을 지키는 중요한 전초기지이며 요충지였다고 생각된다.

◇ 이서국(伊西國)의 유적과 유물
문헌 기록에 전하는 이서국의 역사는 대체로 기원후 1∼3세기의 일들이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청도 지역의 유적들이 이서국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고고학적으로 원삼국(진한·변한) 시대에 해당된다. 원삼국 시대에는 목관·목곽묘와 움집터를 비롯해 와질 토기가 대표적인 고고학 자료이고 목책 토성이 나타나는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이서국의 원삼국 시대에 해당되는 유적으로는 이서국 성지로 알려져 있는 백곡토성과 이서산성(폐성 또는 주구산성으로도 불리어짐)을 들 수 있으나, 아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바 없어 추정만 할 뿐이다.

백곡토성은 백곡 마을을 감싸고 있는 해발 100∼120m의 구릉 남쪽 부분에 만들어져 있으며, 토루는 길이 200여 m에 이르고 높이 1∼3m, 폭 2∼3m를 이루기도 하나 대부분 경작에 의해 삭평되거나 밭둑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변에서 연질 토기 편을 비롯해 5∼6세기경의 신라 토기도 채집되는 것으로 미뤄, 백곡토성은 이서국 시기인 3∼4세기경에 처음 만들어졌다가 신라에 복속된 이후에도 계속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서산성은 신라 유리왕 대 이서국 침공 설화에서 폐성(吠城)의 유래를 지닌 토성지로서, 현재의 화양읍 소라동과 청도읍 송읍리 사이의 절벽으로 이뤄진 주구 형상의 돌출된 지대이며 정상부에는 넓은 평지가 만들어져 있다. 근래에 예비군 훈련장으로 사용돼 일부 지형의 변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대체로 원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벽으로 추정할 만한 토루 부분이 북동쪽에 일부 남아 있으나 명확치는 않으며, 우물터와 문지로 추정되는 곳도 있다. 성지 내부에서는 4세기 대의 토기 편을 비롯해 고려 시대의 토기 편과 기와 편도 다수 보인다. 이서산성은 지대가 험준하고 협소하며, 북쪽 능선을 따라 이서국 도읍지인 백곡토성 쪽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존재할 뿐 아니라 입지상 주위를 조망하기에 적합해 이서국의 전초 기지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 이서국의 고지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는 청도 신당리 유적 발굴 조사에서 이서국 당시의 고고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원삼국 시대의 원형과 방형계 움집터가 확인됐다. 원삼국 시대의 와질 토기로 알려져 있는 조합식 우각형 파수부호(쇠뿔 손잡이 항아리), 주머니호(주머니 항아리), 타날문 단경호(두드린 무늬 항아리)가 출토됐다. 이들 고고 자료는 영남 지방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비추어 볼 때, 기원후 1∼3세기 삼한 소국들의 존재와 그 문화상을 보여 주고 있다. 문헌에 보이는 이서국의 배경 문화를 이들 고고 자료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이들 고고 자료는 인접한 경산의 고대 소국인 압독국 유적에도 동일하게 분포하고 있어서 앞으로의 비교 연구가 주목된다.

한편 이서국의 고지인 청도 분지의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청도천 주변의 진라리, 무등리, 범곡리, 송북리, 눌미리, 합천리, 칠성리, 화리, 신당리 등에는 다수의 청동기 시대 고인돌군이 무리를 이뤄 분포한다. 이들 고인돌과 함께 진라리·송읍리·신당리 등에서 다수의 청동기 시대 집터와 돌검·민무늬 토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됐다. 고인돌과 집터는 영남 지역 청동기 시대의 대표 유적으로 꼽히고 있어 이서국의 앞 시기인 청동기 시대부터 청도 지역에 유력한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들 유력 집단이 이서국의 기반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 도움말 : 이형우 전 영남대 교수 >

이부용 기자  queennn@paran.com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부용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