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학교 교장신부님은 저승사자 같았다.‘학생들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나무랄 데가 없는 듯 해 보이는데 모아 놓으면 그 가운데 꼭 마귀 같은 놈이 생긴다.’고 하셨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더 건설적이고 어떻게 사랑을 나눌 것인가? 서로 화합하고, 봉사하는 삶의 즐거움이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을 연구해야 하는데…, 꼭 나쁜 쪽으로만 모의하고 잔머리를 굴린다는 한탄 섞인 말씀이기도 했다.

그렇게 저승사자 같으신 분이셨지만 본당신부로 나가셔서는 그렇게 인자하실 수가 없었다. 결국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머리로만 아는 것도, 입으로만 하는 것도, 마음이 다하지 못하고 몸만 움직이는 것도, 듣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두고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겉으로 드러나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메시아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어린양’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될 때 이스라엘의 맏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대신 죽은 희생양을 파스카의 어린양이라고 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짓게 되면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다. 이 때 바치는 제물이 어린양이었다.

속죄의 제물로 어린양을 잡아 하느님께 바쳐드리면서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청하였다. 그런 ‘어린양’을 예수님에게서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속죄의 양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제물이 되신 분이시다. 우리 죄를 대신한 속죄의 양이자 파스카의 양, 희생양이 되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대신 수고하시고, 우리를 위해 대신 피 흘리시고, 우리를 위해 대신 속죄하고, 우리를 위해 대신 봉사하고, 우리를 위해 대신해서 희생 제물로 봉헌되시는 그런 삶을 살아가시는 분임을 표현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어린양이 되도록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분이시다. 그런 예수님을 우리가 받아 모신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 사제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 신자

우리는 내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청하면서 평화를 기원하면서 성체를 받아 모신다.
그것은 이제는 애가 그런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 또한 어린양이 되겠다는 의지를 담고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다.

내 주장보다는 전체를 바라보고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는 삶도 마다 않겠다는 의지를 담고 하느님의 어린양인 성체를 받아 모신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어린양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을 바라보고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살아야할 것이다.

때로는 어리숙해 보이고, 미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의 삶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리고 거창하고 화려한 것에서가 아니라 표 나지 않지만 성실함 안에서 내 것만을 내세우는 고집에서가 아니라 희생하고 양보하는 가운데에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분노함에서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으로 나누어지는 삶을 통해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고 안내자가 되게 살아야 할 것이다.

올 한 해는 공동체의 실천사항을 내가 먼저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살아보자. 그래서 우리 삶도 하느님의 어린양처럼 다른 이들에게 기쁨이 되고 사랑이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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