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숲이 끝나는 곳에 하얀 구조물 하나가 있다. 빛의 건축물인 등대다. 수직의 높고 단순한 모습은 무뚝뚝한 듯 보이지만 편안하다. 방파제가 베고 누운 산의 기운 탓일까. 해질녘이라 더욱 아름답고 등대는 어둠 속 빛이 될 준비로 저 홀로 외롭다. 화려하진 않지만 아늑하고 소박한 멋을 간직한 어촌. 다홍빛 능소화가 담을 넘고 등대는 봉선화 꽃물 같은 저녁놀에 연붉게 물들고 있다. 이윽고 특별할 것 없는 마을 예배당 지붕 십자가에 마지막 햇살이 비추다 바다로 떨어지면 반드시 드러나야 할 의미를 품은 듯. 등대는 파랗게 반짝인다.
층층이 난 사선의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등대 꼭대기의 빛을 향해 하얀 기둥에 붙은 세 개의 문을 지난다. 그 옛날 바다 너머 세상 끝엔 낭떠러지가 있다고 믿었던 과거의 문을 지나고 위성과 교신하며 자율항해 한다는 현재의 문도 지난다. 바다와 약속을 지키기 위한 등대의 숙명 같은 오름이다. 앞으로는 누군가에게 희망과 도전의 상징일 미래의 문마저 지나 가장 높은 곳에 이른다. 마치 바다를 건너고 시간을 건너와 인간과 자연의 조우, 투쟁, 조화하는 등대의 운명 같은 길처럼 느껴진다. 마음이 아득하면 머무는 곳도 외로운 법. 그곳에서 일생을 등대처럼 살다 간 한 아낙의 외로운 영혼을 만난다.
오십년 전. 음력 시월 열이틀. 물 맑은 산골 벙어리 처녀는 운명처럼 아이 셋 딸린 홀아비 어부를 만나 시집을 갔다. 처녀는 등대가 되어주겠노라는 어부를 믿고 바다처럼 넓은 그의 곁에 닻을 내렸다. 흥부네 집을 찾아온 제비 같은 존재였을까. 축복이라도 하듯, 그날 밤하늘은 눈부시게 푸르고 큰개자리 코끝의 시리우스는 더욱 또렷했다. 일등성 별들의 반 이상이 얼굴을 내밀어 반겼고, 황소자리 붉은 별은 잉걸불처럼 발갛게 청사초롱 불을 밝혔다.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어부는 무겁고도 뿌듯한 존재로, 사슴의 눈을 한 산골처녀는 선하고 평화로웠다.
부지런한 어부는 날마다 통통배를 몰고 나가 그물을 던지고 고기를 잡았다. 가난한 집 다섯 여섯 개의 밥그릇을 사수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과도함은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배를 띄웠던 어부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아직 바다와 조우조차 못한 아낙의 마음도 그날 밤 폭우 속에 무너져 내렸다.
어느 날, 황망히 떠나버린 남편을 대신해 아낙은 강해야만 했다. 어떤 폭우, 강풍 앞에서도 가장이라는 등대가 사라진 자리에 아이들을 위한 안식처로 살아남아야 했다. 낮선 바다에 떨리는 몸을 담그고 잠녀(潛女)의 생활을 시작했다. 아낙의 나이 스물하고도 여섯인 해였다.
산골처녀의 섣부른 잠녀 생활이 쉬웠을까. 한동안 고즈넉한 어촌엔 비명 같은 아낙의 숨비소리가 가랑비에 섞여 눈물처럼 내렸다.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보지 못하는 게 상사화다. 그렇지만 봄마다 잎이 푸르기를 멈춘 적 없고, 여름마다 꽃이 붉기를 그친 적 없었던 것처럼 아낙 또한 그러했다. 남편을 묻은 바다 위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일념 하나로 헤엄쳐 다녔다. 폭우에 찢기고, 강풍에 쓰러져도 희망이 되어주기 위한 몸짓 하나로 다시 일어나 바다로 향했다.
아버지를 잃은 두려움에서도 아이들을 지켜준 아낙의 굳건한 의지 때문이었을까. 성장한 큰 아들은 미역 농사를 짓기 위해 바다에 터전을 잡았다. 해양대학을 졸업한 둘째는 원양어선을 타고 더 넓은 대양으로 나갔다. 벙어리 엄마를 위해 곁에 남은 효심 깊은 막내까지 아이들은 아낙의 깊은 상처에 치유의 힘이 되어 주었다. 그 치유란 상처에 대한 기억을 덮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기억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무한한 에너지였기 때문이었다.
안개에 가려 바다가 보이지 않는 날이면 등대는 얼마나 서러웠을까. 산골처녀의 어설픈 자맥질 일생은 또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그러나 시작과 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듯, 자욱한 안개 같은 삶의 끝에는 빛이 있었다. 아이들을 통해 치유라는 명약도 얻었다. 등대가 주는 감동이었다.
홀로 빛을 밝히고 서있는 고독한 등대를 본다. 반짝이는 파란색 빛이 아름답다. 어디에 있던 지금 있는 그곳이 내 자신의 자리임을 깨닫는 것은 어떤 실천적 의미가 있을까. 등대로 가는 길은 심연의 공간으로 떠나는 인고의 길이었을 터. 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한 자만이 세상과 타인의 길잡이가 되어 어둠 속 빛이 되지 않았을까.
등대는 항구도시가 만들어낸 가장 뛰어난 세공품이다. 단순하게 생겼지만 그 기능은 소중한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위대한 빛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일은 인간의 본능이다. 내가 처한 그곳에 초점을 맞추고 의미를 찾아 그 가치를 극대화하는데 주력할 때 우리 또한 누군가의 등대 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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