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용 문화기획팀장

▲ 수면에 비치는 아름다운 봉황당의 모습.

“극락이 의심스러우면 우지의 어당을 찾아가보라.”

나라시대(710~794) 후반기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격해졌고, 불교의 승려들이 정치에 진출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등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황실에서는 간무천황의 부인이 요절하고 이듬해 천황의 모친이, 다음 해에는 며느리가 죽었다. 황태자도 정신 이상 증세을 보였다. 간무 천황은 황실 터가 좋지 않다고 판단, 794년 나라(奈良)에서 교토의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했다. 나라와 황실의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마음이 새 도성 이름에 반영됐다.

헤이안 시대(794~1185)는 천도한 때부터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질 때까지 지속됐다. 나라 시대에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율령제가 확립된 후 초기 시대까지 천황의 직접적인 통치가 이뤄졌다. 그러나 후지와라(藤原)씨의 정치 전단 속에 점차 귀족과 승려의 세력이 커지면서 천황이 힘이 약화되고 부패와 혼란이 심해졌다. 후지와라 가문이 나라시대에 이어 헤이안시대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자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칸바쿠(関白·관백)’와 ‘셋쇼(摂政·섭정)정치’ 때문이다.

천황가로 시집을 간 딸이 아들을 낳으면 외조부가 정치에 관여했다. 세이와 천황의 외조부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신하로서는 최초로 셋쇼가 됐다. 그는 천황이 성년이 되어서도 그 자리를 내놓지 않으려고 칸바쿠로 역할을 바꾸어서 계속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셋쇼(섭정)와 칸바쿠(관백)에서 머리 글자를 따서 셋칸(摂関)정치라고 한다. 관직이 특정 가문에서 세습하게 되자 귀족의 최고위는 셋칸케(攝関家)로, 중간귀족층은 중앙에서 가업의 전문역할에 따라 공무 담당 기능관인으로서 행정 실무를, 지방에서 수령으로 행정을 맡았다. 셋칸케가 주도하는 셋칸 정치가 펼쳐지면서 특정한 권력 가문에서 독점 징세권을 가진 장원(荘園)과 수령이 징세권을 맡는 공령(公領)과 함께 세력이 둘로 갈라졌다.

한 가문이 200년 간 셋쇼 칸바쿠를 독점하니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하급 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무사 계급이 이들을 제압하면서 군사집단에서 정치세력으로 강화되기 시작했다. 가마쿠라 막부(1185~1336)가 성립하자 천황과 귀족들을 제압한 무사들에 의한 정치가 본격화 했다. 무로마치 막부, 아즈치모모야마, 도쿠가와 막부에 이르기까지 무려 700여 년 간 이어졌다.

교토(京都) 남부 우지 강변에 있는 뵤도인(平等院)은 후지와라 가문의 별장으로 지어졌던 것이다. 뵤도인에는 곳곳에 아름다운 등나무가 관람객들을 반기는데 후지와라 가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성이 한자로 藤(등나무 등)과 原(근원 원)자를 써서 등원이다. 극락의 연못에 떠 있는 불당의 모습이 아름답게 수면에 비치는 것이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이다. 1053년 후지와라노요리미치는 그의 아버지 후지와라노미치나가로부터 물려받은 이 별장을 아미타불을 모신 사찰로 바꾼다. 이 시기에는 불교가 쇠퇴하는 말법의 세상이 시작되는 때로 여겨 극락에 가게 해달라는 소망을 담아 건립했다.

극락정토에 태어난 사람이 이승에서 쌓은 공덕, 성격, 행위에 따라 태어나서 받는 과보는 아홉 가지 단계로 나뉘고, 평생 지은 업에 따라 차등이 있는 연대에 앉게 된다. 연지는 연꽃을 키우는 연못으로, 불교에서는 연화세계를 상징한다. 즉, 극락세계이다.

구품연지(九品蓮池·9단계로 구분된 연못)위에 아미타여래상을 안치한 '아미타 불당'은 정면에서 볼 때 마치 날개를 펼친 새처럼 보이고, 지붕 용마루 좌우에 봉황이 앉아있다고 해서 에도시대 초기부터 '호오도(鳳凰堂·봉황당)'라고 불렀다고 한다. 엔화 10엔짜리에도 새겨져 있어 더욱 재미를 더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곳은 2012년부터 3년에 걸쳐 보수를 했다. 실내에는 별도로 표를 끊고, 정해진 시간에만 들어갈 수 있다. 아미타여래좌상, 천개, 운중공양보살상 등의 조각과 봉황당 중당 여닫이문 그림(구품내영도) 등 회화 작품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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