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용 문화기획팀장

▲ 우지카미신사의 배전.

제신(신사에서 모시는 신)이 땅에 내려와 길을 잃었다. 귀여운 토끼가 나타나 제신이 계속 따라오는지 확인하며 안내를 해 줬다는 전설이 있다. 토끼는 '도덕적으로 자신을 돌이켜보며 올바른 인생을 걸으라'는 가르침을 주는 존재가 됐다. 토끼 길을 일본어로 ‘우치’라고 읽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우지의 유래가 됐다고 한다. 경내 곳곳에서 토끼 인형과 토끼가 그려진 에마(絵馬·일본의 신사 및 사원 등에 소원을 담아서 봉납하는 그림을 그린 목판) 등이 눈에 띄었다.

교토부 우지 시(宇治市)에 있는 우지신사는 '우지노와키이라츠코(兎道稚郎子)'만 모신 신사다. 고대의 일본의 관례에는 젊은 사람에게 양위하는 것이 활약할 수 있는 기간이 길고 국가 번영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닌토쿠 천황의 이복 동생은 오진 천황의 황자였다.

‘일본서기’에 “오진(應神)천황 15년 가을 8월에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를 보내 좋은 말 2필을 바치니 아직기에게 말을 돌보게 하였는데, 아직기가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인 우지노와키이라츠코(兎道稚郎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에 천황이 아직기에게 '그대보다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하고 물으니, 아직기가 '왕인이라는 사람이 뛰어납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래서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불렀으며, 오진천황 16년 봄 2월에 왕인이 오자 태자의 스승으로 삼고 여러 경전과 서적을 배웠는데 막힘이 없었다. 왕인은 후미노오비토(書首) 등의 시조이다”라고 적혀 있다.

백제의 왕인 박사가 유교를 전파해 장자 상속제가 성립되면서 형인 닌토쿠가 천황을 물려받게 된다. 우지노와키이라츠코는 황위를 안정되게 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우지카미신사(宇治上神社)는 15대 오진 천황, 아들 16대 닌토쿠 천황, 닌토쿠 천황의 이복 동생을 모신 신사다. 1994년 고도 교토의 문화재의 일부로써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2004년 나라 문화재 연구소 등의 조사에 의해,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신사 건축임이 밝혀졌다. 본전은 1060년 경 세워져 1052년에 세워진 뵤도인(平等院)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전은 1215년경 벌채된 노송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본전보다 약 150년 뒤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한다.

오진 천황의 황자의 별궁이었다는 설이 있고, 60대 다이고 천황이 신탁을 받고 901년에 설립했다는 설도 있다. 최초 기록은 927년 '연희식'이라는 문헌에 '우지에 두 자리의 신사'가 있다고 돼 있는데 이것이 우지카미신사의 두 건물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우지카미신사에 바로 아래 위치한 '우지신사'를 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본전은 헤이안 시대(794~1185) 후기에 만들어졌다. 메이지 시대(1868~1912)까지는 인접한 우지 신사와 2개소로, 리큐묘진(離宮明神)이나 리큐하치만(離宮八幡)이라 불렀다. 메이지(明治)유신까지 우지 신사는 시모샤(下社), 우지가미 신사는 카미샤(上社)였다.

본전은 히와다부키(檜皮葺)의 복옥으로, 노송나무껍질로 이은 지붕을 뜻한다. 일본 고유의 전통적인 지붕 공법이다. 전래 초기에는 기와가 더 격식이 높은 기법이었지만, 헤이안 시대 이후 국풍 문화의 영향으로 히와다부키가 가장 권위 있는 기법이 됐다. 기와에 비해 자유로운 곡선의 표현이 가능하다. 처마가 날렵하게 곡선을 그리기도 한다.

배전은 카마쿠라 시대(1185~1333)초의 것으로, 헤이안 시대의 신덴즈쿠리(寝殿造)헤이안 시대의 귀족들의 대표적인 주택 양식)다. 배전 앞에는 원추형의 모래 산이 두 개 있는데 '키요메스나(清め砂)'라고 하며 '정화하는 모래'라는 뜻이다. 이 모래는 매년 9월 1일에 받아 1년 동안 사용한다.

이 밖에도 카마쿠라 시대에 세워진 카스가 신사 등의 셋샤(본사의 제신과 인연이 깊은 신을 모신 신사)가 있다. 우지칠명수(宇治七名水)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키리하라미즈(桐原水)는 배전 바로 우측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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