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용 문화기획팀장
3차례에 걸친 발굴 결과, 유물은 총 2만3502점에 달했다. 동전 800만개(28톤), 자단목(아열대산 최고급 가구 목재) 1017개, 선체조각 445개가 나왔다. 260톤의 선적량을 갖고 있던 배는 모두 140톤의 물품을 적재했다. 가장 큰 부피와 양을 차지한 것은 도자기와 동전, 자단목 원목이었다. 난파선에서 인양된 도자기는 무려 2만661점이었다. 청자가 1만2359점, 청백자·백자는 5303점에 달했다. 대형 무역선이라는 얘기다.
선적한 물품에는 상품의 종류와 수량, 선적일자, 수령인의 이름과 주소를 적은 나무 패(목간)가 364점 달려 있었다. 일본 학계에서는 신안선이 사찰의 건축이나 복구비용을 조달하려고 일본이 파견한 무역선으로 추정했다. 도후쿠지가 사원의 재건자금을 마련하려고 가마쿠라 막부(鎌倉·1192~1333)의 허가를 받아 원에 파견된 무역선이라는 것이다. 신안선에서 확인된 목간 364점 가운데 ‘도후쿠지(東福寺)’라고 적힌 것이 무려 41점이나 되는 것을 근거로 삼는다.
교토시(京都市) 혼마치도리(本町通)에 있는 도후쿠지(東福寺)는 가마쿠라시대에 창건된 선종사찰로, 신안해저유물의 '동복사공물(東福寺公物)'이라는 목간이 나와 더욱 유명하게 됐다. 선조40년(1607) 일본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파견하고 조선도 일본에 전후 최초로 사신을 파견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 경섬(慶暹)이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사행일록(使行日錄)인 '해사록'에 의하면, 통신사일행은 교토의 이총을 조문한 후 도후쿠지와 삼십삼간당(三十三間堂)을 방문했다고 한다.
사신으로 간 경섬은 '해사록'에서 도후쿠지의 거대한 가람배치에 대한 감탄과 도후쿠지의 위치, 도후쿠지의 삼문에 올라가 본 풍광 등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 있다. 1607년 당시에 막부가 교토시내의 가까운 사찰을 두고 도후쿠지로 안내했던 것은 적어도 그 시기 만큼은 도후쿠지가 교토를 대표할만한 사찰로 보존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도후쿠지(東福寺)는 헤이안시대 말기에 나라(奈良)의 도다이지(東大寺)와 고후쿠지(興福寺)에 대적할 만한 사찰로 창건됐다. 이름도 도다이지와 고후쿠지에서 한 자씩 따서 도후쿠지라고 했다. 원래 이 터에는 헤이안 시대부터 후지와라 가문의 사찰인 법성사가 들어서 있었다. 후지와라 가문은 명문가였기에 법성사는 가마쿠라 시대까지 잘 이어져 내려왔다. 후지와라 씨의 자손 중 관백을 지녔던 쿠조 미치이에라는 정치가는 자신의 가문의 씨사를 더욱 중건하는데 그것이 바로 도후쿠지였다.
당시 가마쿠라 막부는 기존의 불교 교리보다 새롭게 발흥하는 선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송나라에서 선종 공부를 깊이 한 엔니벤인 스님을 초빙해 새로운 불교 이념을 담은 선종의 거두로 만들었다. 도후쿠지는 선종을 교토 전역에 널리 퍼트리는데 주요한 사찰로 자리잡게 된다. 가마쿠라 시대에 5개의 거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히며 선종의 불교교리를 이어받은 무로마치 시대에서도 도후쿠지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고대 불사의 주몬(中門)에 해당하는 것을 선종(禪宗)에서는 산몬(三門)이라고 칭한다. '삼해탈문(三解脫門)'의 약자로,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문으로 해석된다. 교토의 선종 삼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선종 총림의 화장실로는 일본 최고(最古) 최대인 '도스(東司)'가 있다. '100인 변소'라고 불릴만큼 큰 규모를 자랑한다. 현재 건물은 1384~1837년경에 재건된 것이다.
사찰 안 계곡 위에 걸쳐 놓은 회랑식 목조다리인 '츠텐교(通天橋)'에서 바라보는 고풍스러운 사찰의 풍경이 아름답다. 다리 주변은 단풍나무가 우거져 있어 가을이면 단풍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모래와 돌로 만든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도 고요한 울림을 준다.
이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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