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태 편집국장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또는 작품' 이라는 것이 사전적 의미다. 이에 반해 외설은 ‘사람의 성욕을 함부로 자극하는 난잡한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 정의만으로는 예술과 외설을 구별하기는 어렵다.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화가 엥그르의 나체화 ’터키탕‘ 이나 ’샘‘을 보고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외설물을 보면서도 성욕과는 관련 없는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

예술과 외설의 구분을 어렵게 하는 이유는 예술과 외설을 구분하는 기준이 시대와 민족, 사회 계층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D. H.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1928)‘은 그 당시 난잡하다는 이유로 금서 목록에 올랐지만, 현재는 문학성이 높은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여타 문학 작품에 비해 음란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현대는 수많은 가치관들이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는 다원화 사회이며,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을 만큼의 뚜렷하고 객관적인 구별 기준의 마련 또한 쉽지 않다.

누구나 알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像)은 벌거벗은 채 성기를 드러내고 있지만 이를 ‘음란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쳐 성적 도의관념에 반한다.”는 모호한 잣대에 의해 ‘음란물’로 인정되어 처벌을 받은 예술가의 경우는 종종 있다.

몇 년 전 중학교 미술 교사가 자신과 임신한 아내의 나체사진 등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띄워 논란을 일으킨 사건에 대해 대법원에서는 ‘음란물’이라는 판결을 내린 적이 있었다. 재판부는 “음란물 여부는 제작자의 주관적인 의도가 아니라 사회의 평균인 입장에서 그 시대의 건전한 통념에 따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김 씨가 여성의 성기를 정밀히 묘사한 그림과 김 씨 부부의 나체사진이 음란물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 판결에 대해 문화연대는 “다양한 창작물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소통되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며 “대법원 판결은 민주주의 방향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래 전, 유명 만화가 이현세의 작품 ‘천국의 신화’ 가 외설 시비에 휘말려 많은 만화가들이 절필을 선언하는 소동이 있었다. 또한 소설가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 연세대 마광수교수의 ’가자, 장미 여관으로‘ ’즐거운 사라‘ 등의 작품들이 ’외설‘로 분류되어 한 때 법의 도마에 올라 실형을 받은 적이 있다. 

대법원 판례에 나타난 ‘음란성 판단 기준’ 을 보면 첫째, 법관이 음란성을 판단하되, 보통인 즉 통상의 성인의 입장에서 판단한다. 둘째, 음란성의 판단 대상은 문서 전체가 되어야 하며 어느 부분의 음란성만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셋째, 음란성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당해 문서의 성에 대한 노골적이고 상세한 표현의 정도와 수법, 묘사 서술이 문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 문서에 표시된 사상 등과 묘사 서술과의 관련성, 문서의 구성이나 전재 또는 예술성, 사상성 등에 의한 성적 자극의 완화 정도 등을 검토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예술과 외설을 구분하는 데에는 `음란성' 이란 다소 모호해 보이는 기준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대의 건전한 사회 통념',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 `선량한 도의 관념'의 척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는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음란성 여부가 관건인 개개의 사안에 대한 법원의 판단에 수많은 논란이 존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외설성에 대한 판단 역시 국가의 독단적인 결정보다는 예술가의 창작 동기와 해당 작품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