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8월이면 포항시는 용흥동 전몰학도 충혼탑에서 시장을 비롯해 유족 및 생존 학도의용군, 시·도의원, 각급 기관단체장, 시민, 학생 등이 참석해 ‘제62회 전몰학도의용군 추념식’을 거행한다.

올해 행사는 생존 학도의용군과 고 이우근 학도병 조카, 제철고등학교와 영신고등학교 학생들이 함께 참석하여 추념식의 의미를 더했으며,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 학생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피 묻은 편지 “어머니 전상서”를 제철고 학생이 직접 낭독하여 참석자들을 더욱 숙연하게 했다고 한다.

추념식이 거행된 전몰학도 충혼탑은 1957년 6월 15일에 건립돼 포항여중전투에서 사망한 김춘식 등 1,394위의 학생들의 영령들이 봉안되어 있다.

포항전투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포항을 두고 북한군과 1개월 이상 펼쳤던 공방전이다. 국군 제3사단은 1950년 8월 초까지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북한군을 저지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영덕과 강구일대에 있는 국군을 우회해 후방에 있는 흥해와 포항을 점령했다. 이에 국군은 고립돼 분투하다가 장사동에서 포위됐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키 위해 미 제8군사령부는 해상 철수를 명령하고, 국군 제3사단은 8월 16일 밤부터 아침까지 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한편 점령된 포항은 국군의 민기식 부대에 의해 탈환돼 제3사단이 이를 인수했다. 그리고 9월 1일 포항 북쪽에 있는 북한군을 공격했다. 2일 포항 북쪽지역은 북한군의 9월공세로 혼전이 전개되고, 인접한 수도사단의 전선이 무너짐으로써 국군 제3사단은 방어선을 형산강 이남으로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북한군의 공세도 한계점에 도달해 더 이상 진출하지 못했다. 결국 포항을 점령한 후 동해안을 따라 부산으로 남진하려던 북한군의 기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영화 <포화속으로>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는 비참했던 역사적 사실을 한 소
년의 절절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이 편지의 주인공은 끝내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 했는데, 학생의 상의 호주머니에서 발견된 수첩에 적혀 있었다.

포항여중 전투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일주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어 우리 정부가 후퇴를 거듭하다 부산에 임시수도를 정하고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방어선으로 육군 제3사단 소속 학도의용군 71명이 목숨을 걸고 투쟁한 격전지다. 이 전투로 당시 이우근 학도병을 비롯해 47명의 꽃같은 목숨이 산화했으며 전국에서 제일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격전지로 기록되고 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두려움과 맞서 스스로 포화 속에 뛰어든 뜨거웠던 가슴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평화통일이 실현될 때까지 이 나라를 지켜 오신 자랑스러운 포항의 역사이자 호국의 역사를 늘 간직해야 한다.

아울러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했을 때 펜 대신 총을 잡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학도병들의 위국 헌신의 정신을 배우고 길이 이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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