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용 문화기획팀장·오스트리아 <3>

▲ 상궁과 하궁 사이에는 프랑스식 정원이 있어 산책을 즐기기에 좋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가슴이 먹먹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림’을 보고 울었다. 슬픔이었다. 그림 속 여인의 황홀한 아픔이 그대로 전달됐다. 한 그림 앞에서 하루 종일 있다가 돌아간다는, 영화 속에서만 보던 이야기가 피부로 와 닿았다. 에곤 실레(Egon Schiele·1890~1918)의 ‘죽음과 소녀(Death and the Maiden)’였다.

1911년 쉴레는 클림프의 소개로 17세의 모델 '빌리'를 만났다. 쉴레는 1912년 4월 13일 어린 소녀를 유혹하고 에로틱한 그림들을 보여줘 도덕적으로 타락케 했다는 죄로 24일 간 감옥에 갇히게 된다. 재판과정에서 판사는 쉴레의 드로잉 한 점을 불에 태워, 그의 부친이 쉴레에게 가한 모독감을 일깨우게 했다. 감옥살이 경험은 쉴레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겨 그 후로 쉴레의 성격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쉴레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일기에 기록했다.

"청문회에서 압수당한 내 그림, 내 침실에 걸려있던 그림 중 하나가 법복을 입고 있던 판사의 촛불에 엄숙하게 불타버렸다. 아우토타페(이단자의 화형), 사보노롤라(화형) 종교 재판! 중세 시대! 거세! 위선! 그러면 박물관에 가서 가장 위대한 예술품을 조각조각 내버려라. 성을 거부하는 이들은 낳아준 부모를 가장 최저의 방식으로 더럽히는 불결한 사람이다."

빌리는 이 모든 과정을 그와 함께했다. 1914년 쉴레는 청교도이자 중산층인 에디트를 선택했다. 그녀가 사회적으로 용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쉴레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좀 더 유리한 결혼을 하려고 해. 빌리가 아니라"라고 썼다. 빌리는 쉴레가 에디트와 결혼하자 떠났다. 쉴레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때 그린 그림이 ‘죽음과 소녀’이다. 그림 속 여인은 온 몸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껴안지만 남자는 받아주지 못한다. 밀쳐지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발버둥치는 여인의 미래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벨베데레 궁전(Belvedere Palace)은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가 설계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1716년 별궁인 하궁(Unteres Belvedere), 1723년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상궁(Oberes Belvedere)을 지었다. 오스트리아를 침략한 투르크 군대를 무찌른 영웅 오이겐 폰 사보이 공(Eugen von Savoyen)의 여름 별궁이었다. 오이겐 공이 사망한 뒤 합스부르크가에서 벨베데레 궁전을 매입·증축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페르디난트가 잠시 거주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대부분의 작품을 상궁으로 옮기고 하궁에서는 매번 바뀌는 주제에 따라 전시를 하고 있다.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의 회화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클림트는 1897년 일부 예술가들과 '인생은 예술이며 예술은 곧 자유'라는 기치 아래 기존의 예술 협회에서 탈퇴하면서 빈 분리파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클림트만의 독특한 금박 기법을 사용한 '키스(The Kiss·1907~1908)'는 세상에 내놓자마자 호평을 받아 오스트리아 정부가 사들였다. ‘키스’는 외국 반출이 불가하며, 세계 곳곳에서 온 관광객들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벨베데레 궁전을 찾는다. 적장을 살해한 신비로운 여인을 묘사한 ‘유디트 Ⅰ(Judith I·1901)’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벨베데레 궁전은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초상’,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등 유명 작품 외에 풍경화도 보유하고 있다. 회화 작품 외에 독일 조각가인 프란츠 메서슈미트의 찌푸린 얼굴을 주제로 한 두상 연작 등도 만나볼 수 있다.

예술이 관광이 될 수 있는 곳, 음악과 미술이 살아숨쉬는 곳, 오스트리아. 영혼의 '쉼'이 필요하다면 이 곳을 들러보길 권한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