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1903년 러시아는 일본에 39도선을 경계로 조선을 분할하자는 제의를 하였으나 거절되었다. 1896년엔 일본이 러시아에 38도나 39도선을 경계로 두 나라가 조선을 분할 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러시아가 반대한 적이 있다.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明에 조선의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를 일본에 넘기고 조선은 그 이북만 통치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하였지만 明이 거부하였다. 포츠담의 美蘇 군사회담엔 합참 소속의 전략정책단장 링컨 준장이 배석하였는데 그는 나중에 38도선 획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7월 30일 미국의 전쟁지도기구인 합동전쟁계획위원회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소련에 對日 참전 대가로 쿠릴 열도 사할린 그리고 북한지역의 점령을 제안할 것을 건의하였다.

1945년 8월 2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당시 일본은 막후에서 항복 조건을 타진하고 있었지만 군부 반발을 우려하여 거부한다고 하지 않고 묵살한다고 하였다. 트루먼은 거부라고 해석하고 원폭 투하를 서두른다.

8월 9일 소련군 158만 명은 만주로 밀고 내려가는데, 그날 함북 경흥군에 진입하였다. 12일엔 소련 해병대가 함북 웅기, 나진항을 장악하였다. 13일엔 청진을 공격, 16일에 점령한다. 두 방의 원자폭탄을 맞고 소련군이 진격을 개시한 8월 9일에서 10일에 걸쳐 도쿄의 천황 궁궐 방공호에서 최고전쟁지도회의가 열렸다. 스즈키 총리는 항복을 건의하였지만 군부는 결사항전을 주장하였다. 昭和 천황은 "견딜 수 없는 것도 견딜 수밖에 없다"면서 항복을 결단하였다. 10일 일본 정부는 스위스와 스웨덴의 일본 공사관을 통하여 연합국에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하겠다는 통보를 하였다. 그날 정오 도고 외상은 일본주재 말리크 소련 대사에게 항복 결정을 직접 통보하였다. 스탈린은 트루먼보다 한 나절 먼저 알게 되었다.

8월 10일 오전 트루먼 대통령은 긴급 각료 회의를 소집, 일본의 항복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냐를 토의하였다. 번스 국무장관은 천황제를 유지할 순 없다고 반발하였지만 스팀슨 전쟁장관 포리스털 해군장관 등이 수락을 건의, 트루먼은 일본의 항복을 수용하기로 한다. 이 자리에서 미국이 한국 전역을 점령하여야 한다는 해리만 등의 건의가 있었지만 트루먼은 미군이 전개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면서 분할 점령에 동의하였다.

8월 10일 저녁 전쟁부 차관보 존 맥클로이는 파견 근무 중이던 두 육군 대령 딘 러스크, 찰스 본스틸에게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할 수 있는 선을 그으라고 지시하였다. 가능한 넓은 지역을 확보하도록 하되 미군의 능력을 고려할 것을 지침으로 주었다.

두 대령은 옆방으로 들어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한반도 지도를 보면서 간단하게 38도 선을 분할 점령선으로 결정하였다. 한국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는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러스크의 회고에 의하면 38도선 이남에 서울과 부산항이 있다는 점이 크게 고려되었다고 한다. 38도선은 일본의 조선군사령부와 만주 주둔 관동군사령부의 관리 경계이기도 하였다.

8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한반도 분할 점령안을 통고하였다.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24군단을 한국으로 보내도록 맥아더 사령관에게 지시하였다. 스탈린은 8월 16일 미국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다만 소련군이 쿠릴 열도뿐 아니라 훗카이도의 북반부를 점령하였으면 한다는 수정제안을 하였을 뿐이다.

미국은 스탈린이 며칠 간 숙고한 뒤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너무나 빠른 답신에 놀랐다. 스탈린이 왜 38도선 분할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는지 지금까지도 여러 설이 있다. 소련은 한반도 전체를 점령한다는 생각이 원래 없었고 다만 소련에 적대적인 세력이 전부를 지배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된 관심은 러일전쟁 때 일본에 당한 수모가 하나의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일본 점령에 소련이 참여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한반도 점령을 둘러 싸고 미국과 대결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도 하였을 것이다.

미국은 그러나 스탈린이 그토록 원하던 일본 분할 점령 관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한반도 분할을 한반도 분단으로 악화시키는 운명적 조치를 취한다. 스탈린의 명령은 38도선을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영구 분단선으로 굳히는 방향으로 우선 집행되었다. 소련군은 주한미군의 38도선 자유왕래를 논의하자는 제안을 거부하고, 38도선에 있던 소련군 연락사무소를 폐지하였으며 드디어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였다. 38도선이 금단의 분단선으로 바뀐 것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스탈린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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