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 위치한 임청각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로 조선 당시에도 흔하지 않던 99칸 집이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집안과 비교될 정도로 명문가였던 집안으로 나라가 빼앗기자 이상룡 선생은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다.

독립운동 특성상 수입은 없고 지출비용만 있었던지라 후일이 되자 모든 재산을 탕진하게 되었다.
그때 이상룡 선생은 안동 본가에 연락해서 집을 지키던 가문 사람들에게 “임청각을 팔아서 그 돈을 만주로 보내라”고 명을 내린다.

이 말을 전해들은 가문 사람들은 유일하게 남은 집안의 재산이자 뿌리가 임청각인데 이것만은 남겨두자 했으나 이상룡 선생은 빨리 임청각을 팔아서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내라고 말했다. 결국 가문사람들은 고민 끝에 독립운동자금을 스스로 모아 만주로 보내고 임청각은 지키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일제는 당시 철도건설 설계에서 길게 돌아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철도노선을 임청각 중간을 통과시키는 노선으로 정했고, 결국 임청각 일부를 허물기까지 하면서 철도가 설치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광복 후에는 이상룡 선생의 후예들이 국가 사적이 된 임청각을 집안에서 관리하는 것은 힘이 들고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을 것이니 나라에서 관리해주길 바란다며 임청각을 국가에 기증했다.

지난 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이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할 때 결성한 것으로 보이는 ‘가족단명첩’(家族團名帖)이 발견돼 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안동시와 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5월부터 벌인 ‘안동댐 수몰마을 생활사 복원을 위한 아카이브 사업’ 과정에서 이를 발견했다. 가족단명첩의 존재는 석주 선생의 유고(遺稿)나 아들인 동구 이준형 선생의 문집에서 언급된 적이 있지만, 그 실체가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족단 명첩’은 안동댐 준공으로 마을이 물에 잠긴 안동 도곡동 출신 고성 이씨 이종기(91)씨가 보관하고 있었다. 첫 장에는 당시 석주 선생 별칭인 이상희를 단장으로 이상동, 이봉희 등과 탑동 종손, 평지파 종손 등 집안대표 66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본문에는 석주 선생이 직접 쓴 가족단 취지서와 이준형 선생 글도 실려 있다.

취지서에는 석주 선생이 만주로 떠나며 종손 부재 때 가족 운영을 당부하는 말, 경술국치로 나라 잃은 데 따른 가문과 문중 사람 각오, 삶을 당부하는 말이 적혀 있다.

가족단은 아들 이준형 선생과 손부 허은 여사 일가가 귀국한 뒤 도곡동에 들어와 살다가 1939년에 가족단을 해체했다. 안동지역 독립운동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석주 ‘가족단 명첩’ 연구에 안동시는 경북도는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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