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10여 년이 지나면 인도가 중국을 제치고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가 된다. 18세기에도 인도가 중국보다 인구가 더 많았다. 인도의 무갈제국이 중국의 淸보다 인구 면에서는 더 컸다는 이야기이다. 인도는 매년 인구가 1,600만 명씩 는다. 네덜란드가 매년 하나씩 생기는 셈이다. 이런 나라가 민주주의를 이어간다.

무갈제국의 창설자 자하루딘 무하마드 바부르는 1483년 2월 24일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에서 왕자로 태어났다. 父系로는 티무르 大帝의 5代孫, 어머니 쪽 혈통으로는 칭기즈칸에 연결된다고 한다. 그는 투르크語와 페르시아語를 배웠고 戰時에도 詩를 지었으며 회고록을 남겼다.

11세에 왕이 된 그는 20代에 지금의 우즈벡을 통일하여 티무르 제국을 회복하려다가 우즈벡族에게 쫓겨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으로 피해 갔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1만 2,000명의 기병이 그를 따랐다. 카불에 본거지를 구축한 그는 북쪽으로 재진격하여 失地를 회복하려 했으나 패전을 거듭했다. 그가 고향 페르가나를 못 잊어 한 것은 땅이 비옥하여 과일과 곡식이 풍성하게 산출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1512년 北進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방향을 돌렸다. 파키스탄, 인도 쪽으로 南進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南征의 피날레는 1526년 4월 12일 뉴델리 근교 파니파트에서 벌어진, 로디 王朝의 아이브라힘王이 지휘하는 10만 군대와의 결전이었다.

이때 바부르의 병력은 2만도 안되었으나 전형적인 유목 기마 전술에다가 총포부대를 결합해 10만 병력의 敵을 섬멸했다. 이 전투는 인도의 역사를 바꾸었다. 몽골系 무갈제국을 탄생시킨 전투였다. 무갈은 이란어로 몽골이란 뜻이다. 바부르는 인도 북부를 점령했으나 더운 날씨에 질려버렸다고 한다. 부하들도 시원한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바부르와 그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페르시아式 정원을 만들어 그들이 두고 온 녹색지대를 再現, 스스로를 달랬다.

바부르(호랑이란 뜻)는 아들 후마윤이 重病(중병)으로 死境을 헤매자 매일 그 病床(병상)을 돌면서 알라神에게 "아들의 병을 저에게 옮겨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소원대로 아버지는 병을 얻어 죽고 아들은 나았다고 한다. 2代 황제 후마얀은 아버지가 건설한 제국을 다 잃어버리고 한때는 페르시아王의 보호 속에서 延命(연명)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 아크바르가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를 포함한 약 320만 제곱킬로미터를 정복, 너그럽게 다스렸다. 전성기인 1700년의 무갈제국의 인구는 약 1억 5,000만 명으로서 중국(당시 청, 1억 2,000만)보다 많았다. 國力과 인구 면에서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

당시 무갈제국의 판도를 지금에 대입하면 인구가 16억쯤 되어 역시 중국보다 많다. 무갈제국을 세운 사람들은 투르크-몽골族의 피가 흐르는 이들이었으나 이 제국을 다스린 세력은 페르시아 관료들과 이슬람 文化였다. 수니파 이슬람에 속했던 무갈의 왕들은 힌두교 등 他 종교를 존중하고 효율적인 관료제도를 정착시켜 수많은 종족을 잘 다스리면서 다양성이 풍부하고 활력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인도의 타지마할과 파키스탄의 라호르 城이란 2대 볼거리를 만든 나라의 이름이 몽골(무갈)제국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17세기 세계 6大 강국은 게르만족이 세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몽골계 북방유목민이 건설한 오스만 튀르크, 淸, 무갈제국이었다.

몽골계 騎馬(기마)군단의 시대가 끝나는 것은 소총이 발명되고 艦船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 해양세력의 대표인 영국이 19세기 중반 무갈제국을 멸망시키고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다. 그때부터 중국, 인도가 100년 이상 서양 제국주의의 東進으로 온갖 수모를 겪는다. 이제 30억 인구를 가진 두 巨大 국가가 다시 일어서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인도 뉴델리 시내 네루대학의 무갈제국 전공 역사학자 하즈반스 무키아 교수를 만나 물어보았다.

자택에서 기자를 맞은 무키아 교수는 『무갈제국의 창건자 바부르는 '원래 우리 할아버지 티무르大帝가 인도를 점령했었는데 그 뒤를 이어받아 내가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제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했었다』고 운을 뗐다.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시인이자 작곡가로, 또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를 이은 무갈제국의 황제들도 문학-학술-그림-건축에 대단한 열정과 재능을 가진 교양인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이 경쟁적으로 건축한 놀라운 모스크, 정원, 기념물들이 지금도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이런 文化的 건설이 또한 무갈제국의 정통성을 강화시켰습니다. 영국통치 시절인 19세기에 인도에서 反英 봉기가 일어났을 때도 정신적인 지주는 무갈 王祖였습니다. 그때는 허수아비가 돼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文化的 번영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서만 보장된다는 점에서 무갈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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