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자 수필가

울산만 서쪽 해안에는 고래잡이로 유명했던 장생포가 있다. 포경업이 금지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던 포구가 고래박물관, 고래문화마을, 고래생태체험관, 고래바다여행선 등 다양한 문화 공간이 생기면서 옛 향취를 찾으려는 사람들로 줄을 잇는다.

테마 관광으로 인기가 많은 고래바다 여행선에 올랐다. 눈부신 하늘이 파란 바닷물에 녹아들고 까칠한 바람이 소맷자락 속으로 파고든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출발한 유람선이 육지에서 멀어질수록 이번에는 고래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마음이 부푼다.

장생포에서 고래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20%의 확률을 가지고 만나는 고래는 어떤 고래들일까? 돌고래, 흑등고래, 밍크고래, 아니, 그 어떤 고래라도 상관없다.

그저 먼발치서 그들이 푸른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가울 것 같다. 저 아득한 지평선에 닿으면 그들이 있으려나. 출렁이는 물결 위에 희망의 봇짐을 얹고 넓고 넓은 바다로 고래 마중 나간다.

항해한 지 두어 시간쯤 되었을까. 스피커에서 선장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린다. 고래 떼가 나타났다는 방송이다. 그때까지 조용하던 유람객들이 선상으로 몰려나와 고래를 찾느라 혈안이다. 아직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넘실대는 파도 위로 부서지는 하얀 물거품에서 그들이 근처에 나타났음을 직감할 뿐이다. 온몸에 긴장감이 밀려온다.

말로만 듣던 고래 떼가 눈앞에 나타났다. 솜씨 좋은 선장은 돌고래와 눈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유연하게 유람선을 몰아간다. 힘차게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참돌고래 떼에 놀란 사람들이 예서제서 환호성을 지르며 야단이다. 출렁이는 물살에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고래를 찾느라 시선이 빼앗긴 사람, 황홀한 광경에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는 연인들로 흥분의 도가니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선장의 목소리에도 기쁨이 가득하다. 이렇게 많은 고래 떼를 만나기란 극히 드문 일이라며 경탄을 금치 못한다. "바다를 박차고 점프하는 고래 떼처럼 오늘 이 배를 탄 선객들 모두 행운이 함께 할 것입니다. 연인들은 사랑이 힘차게 비상할 것이고, 오래된 부부는 가정이 화목하고 금실이 좋아질 것입니다."라며 유람객들에게 행운을 돌린다.

참돌고래는 날씨가 맑고 수온이 적당한 날 울산 앞바다에 자주 출현한다. 떼 지어 소풍을 나온 고래들을 보다 문득,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태산이와 복순이가 저 무리 속에 끼어 있을 것만 같은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태산이 복순이는 제주 앞바다에서 불법으로 포획된 남방큰돌고래였다. 인간들의 볼거리인 돌고래 쇼에 동원 될 뻔하다가 여러 관련 단체의 도움으로 자연 방사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또한 어린 마음에 보았던 고래의 묘기는 신기하기만 했었다. 장대 높이의 공중으로 뛰어올라 먹이를 물어오는가 하면, 미끄러지듯 헤엄치며 공을 받아내던 유연한 몸짓에 매료되어,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 헤아리지 못했다. 지금도 느닷없이 포획되어 우리들의 희생양이 되는 고래들이 적지 않다.

인간의 그물에서 어렵게 벗어난 태산이 복순이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한 마리는 입이 비뚤어진 선천성 기형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먹는 것조차 마다해 사육사의 애간장을 태웠다. 왜 안 그렇겠는가. 사람도 바다에 서면 먹은 것을 토하고 울렁증이 생기는데 하물며 인간들의 손에 잡혀 수족관에 갇혀 지내기란 얼마나 낯설고 답답하고 불안하였겠는가.

자식을 돌보듯 정성을 다하는 사육사의 손길에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 태산이 복순이였다. 살아 있는 고등어를 스스로 잡아먹을 만큼 호전되어 갔지만, 더 넓은 가두리장에서 야생의 본능이 회복될 때까지 맹훈련을 거쳐야 했다. 자생 능력을 키워주는 사육사를 보면서 한쪽에선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저렇게 애쓰는데, 다른 한쪽에선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인간의 욕심이 느껴져 씁쓸했던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태산이 복순이가 무사히 바다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지 오래되어서일까. 수백 마리의 고래 떼 중 유독 유람선 가까이 다가선 녀석을 보니, 태산이 복순이를 만난 듯 반갑다. 지금쯤 녀석들도 가족들 품에서 상처가 잘 치유되었으려나. 오늘같이 바다가 맑은 날 가끔은 장생포로 소풍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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