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대루(晩對樓).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전통문화는 민족 고유의 자산으로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경북 안동은 322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유네스코가 인정한 하회마을과 봉정사 등 2곳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선현들이 현창한 기록을 보여주고 있는 세계기록유산 유교책판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등재 여부가 결정되며 안동을 대표하는 ‘하회별신굿탈놀이’도 내년을 목표로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안동에 유산들이 많은 이유는 지방화의 세계화를 지향하면서 안동만의 우수한 문화를 집중적으로 발굴 육성한 결과다. 세계의 유네스코 도시는 그 나라의 경제를 이끄는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시장경제권 속에서는 지역문화와 결합한 상품이야말로 세계인들이 공감하는 초일류상품으로 세계화할 수 있다.

역사와 함께 흐른 아름다운 낙동강을 따라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살아 숨 쉬는 안동을 찾아보자. <편집자주>

‘한국의 서원’은 생명과 평화, 소통과 화합,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바탕으로 선비들의 교육적 이상을 실천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겸손과 절제를 추구하는 선비정신과 자연과 더불어 심신을 단련하고 수양하며 학문연구를 통해 인류애를 실천하고자 한 자아 성찰과 자기 고뇌의 산실이다.
서원이 지닌 가치는 시대가 바뀌어도 끊어지지 않고 선비들의 학문적 전통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기에 더욱 주목할 만하다.
자연과 함께 일체된 듯, 건축미를 뽐내는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올해 열리는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

◇ 병산서원(屛山書院)
경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에 위치한 병산서원은 도산서원에 비해 그 이름이 생소할 수 있다. 병산서원은 도동서원, 도산서원, 소수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조선시대 5대 서원으로 손꼽힌다. 하회마을을 지나 비포장도로로 들어서면 '이 길이 맞나' 싶은 의구심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선시대로 향하는 길목인 것만 같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기분이 된다. 시간과 함께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배경으로 지어진 병산서원은 가장 아름다운 서원으로 알려진 것처럼,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옛 사림들의 생활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다. 1572년(선조5)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 것이다. 1607년 서애가 타계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13년(광해군5)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했다.

1620년(광해군12)에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위패를 옮겼다. 1629년(인조9) 별도의 위패를 마련해 존덕사에 모셨으며, 그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을 추가 배향했다. 1863년(철종14)에 사액(賜額)돼 서원으로 승격했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보호됐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졌다. 매년 3월 초정일과 9월 초정일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사적 제260호로 지정됐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돼 있다.

◇ 병산서원의 구조, 前學後廟
전학후묘의 구성 원리에 따라 정문에서 시작해 앞쪽에는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강학공간으로 구성하고, 중앙의 강당을 지나 서원 뒤쪽 가장 높은 곳에 배향 공간인 사당을 배치했다.

일반적으로 서원건축은 교학(敎學)을 위한 강학 건물과 제향(祭享) 공간인 사당, 부속시설 등 세 영역으로 구분된다. 병산서원은 강학건물군(복례문, 만대루, 동서재, 입교당, 장판각), 제향건물군(신문, 존덕사, 전사청), 부속시설군(주소, 달팽이 뒷간, 광영지)으로 구성됐다.

병산서원은 조선중기 서원 정신이 한창 부흥하던 시기에 지어졌다. 소수서원과 도산서원 등 초창기 서원건축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특히 풍수지리에 입각한 지형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건물간의 관계를 설정해 자연과의 조화를 이뤘다. 한국 건축물이 높게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는 공간에 대한 상징을 대표하는 ‘현판’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름을 허투루 지은 것이 없고 학문적 의미를 담아 조상들의 뛰어난 지혜를 엿볼 수 있다.

▲ 복례문(復禮門)
병산서원에 가기 위해서는 출입문인 '복례문'을 지나야 한다. ‘복례’라는 이름은 논어 ‘克己復禮爲仁’에서 유래했다. 공자의 가르침을 함축한 경구(警句)로서,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는 유학의 자기절제의 정신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나 병산서원의 실제 출입문은 하나인 것이 특징이다. 솟을삼문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며 좌우로는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 만대루(晩對樓)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만 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히 즐기기 좋구나.”
‘만대’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인 '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에서 따온 말이다.
복례문을 들어서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만대루는 그 크기에 압도당한다. 200여 명이 앉을 수 있다는 만대루에서는 굽이치는 낙동강과 병풍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병산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 입교당(立敎堂)
서원의 핵심적인 건물인 강당이다. 원래 명칭은 숭교당(崇敎堂)이었으며 명륜당이라고도 불렸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이며,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강학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의 명성재(明誠齋)와 서쪽의 경의재(敬義齋), 세 부분으로 나뉜다.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공간으로, ‘이곳에 앉으면 공부가 잘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사진을 찍는 이들로 항상 북적인다.

▲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하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두 건물은 똑같이 크고 작은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됐다. 강당 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다. 2칸 규모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었다.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리를 쫓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했다.

▲ 달팽이 뒷간
매우 재밌으면서도 기발한 건축물이다. 서원 밖 주소(廚所) 앞에 있는 화장실이다.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모양새가 꼭 달팽이 집 같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구조이다. 지붕이 따로 없어 하늘을 마주한다.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400여 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 전해진다. 병산서원의 부속건물에 포함돼 사적 제 206호(1978년)로 지정됐다. 2003년 보수 작업이 이뤄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 광영지(光影池)
마음의 크기만큼 보이는 법이다. 작은 연못에는 조상들의 크나 큰 우주관이 담겨있다.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 즉 '천원지방(天圓地方)' 의 형태이다.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물길을 끌어 들여 만든 조성했다.

▲ 기타
이 밖에도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冊版)과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藏板閣),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한 신문(神門), 서애 선생과 수암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祠堂)인 전사청(典祀廳), 원의 관리와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인 주소(廚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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