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계현

사르트르 성
옹플뢰르 항구

1월 1일 맑은 날씨를 배경으로 우리는 인천을 떠나 파리로 향했다. 파리에서 아파트를 계약해서 10일 넘게 체류했다. 하루 10Km 이상을 걸으며 파리 시내를 다녔다. 여러 박물관, 미술관들을 관람했고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곱추’로 유명한 노틀담 성당부터 에펠탑까지 이어진 센강의 강둑길을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 위대한 영혼을 가졌던 선배 예술가들을 생각하며 고향에서 가져온 소주도 한잔 했다. 국립오페라 극장, 엘투알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 엘리제궁, 마르스 광장, 콩코드 광장, 바스티유 광장, 몽마르트 언덕과 물랑루즈, 파리시청 등 수많은 파리의 옛 건축물을 만났다. 토요일은 파리 시내에서 노란조끼 데모를 하는 날이라, 렌트카를 빌려 파리를 벗어나 프랑스 북부 해안 지방으로 투어를 하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에 출발해서 밤늦게 도착해 처음 들른 곳은 사르트르성당 이었다. 성당과 주변마을은 고즈넉한 운치가 가득했고 빛의 도시를 표방하는 이 도시는 성당 전면을 미디어 파사드 공연으로 장식했다. ‘아기예수의 탄생’이라는 주제로 오래된 성당을 환상적인 빛의 예술로 재탄생시켜 밤마다 관광객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정작 철학자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였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성당 옆 동네의 카페에 들러 와인 한잔을 기울이며 쉬는데 동네 사람들 남녀가 섞여 한잔씩하며 도란도란 얘기하는 모습이 너무 가정적이어서 포근한 쉼터같이 느껴졌다.

우리는 근처 숙소에서 자고 아침 일찍 북서부지방에 있는 ‘생말로’로 향했다. 해적들이 만든 이 항구도시는 파리의 도시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이다. 이곳은 6세기경 영국출신 성 말로가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수도원을 세운 게 지역 이름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바이킹이 쳐들어와 전쟁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마을이 12세기에 세운 성벽으로 둘러싸여있고 성벽 위에 놓여 진 밖을 향한 대포들은 이곳이 전쟁을 많이 치렀던 요새임을 증명한다.

15세기 이후에는 프랑스 왕가의 허락을 받아 합법적으로 외국의 배들을 약탈해서 영국과의 전쟁이 많았다고 한다. 해적이 자리를 잡아 프랑스의 해군역할도 한 것이다. 한번은 네덜란드와 영국이 연합해서 쳐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말로사람들의 이 한마디를 통해 그들의 자존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나는 프랑스도, 브로타뉴 사람도 아니다. 나는 말로 사람이다’ ( Ni Francais ni Breton, mais Malouin suis )

캐나다 퀘백을 개척한 ‘자크 까르띠에’ (Jacques Carter)가 이곳 출신이었고 ‘옹플뢰르’ 항구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퀘백은 바이킹의 후예가 개척한 것이다.)
때마침 도착한 아침바다는 썰물이라 육지와 작은 성이 있는 섬이 연결 되어 있었다. 우리는 푸른 바다 사이로 길게 드러난 모래톱을 걸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10m가 넘는 ‘생말로’는 감탄할만한 비경을 만든다. 수직으로 박혀 검게 그을린 나무말뚝들은 길게 연결된 백사장, 수평선과 어우러져 삼박자를 이룬다. 추상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몬드리안’ 작품의 수직과 수평의 조화를 생각나게 한다.

몬드리안은 네덜란드 신지학회의 지도자적인 인물이었고 ‘진실체가 무엇인가’를 갈구했던 인물이었다. 화려한 교회에는 더 이상 신의 말씀은 없다고 판단한 그는 도시를 떠나 북부해안가를 여행했다. 한적한 바닷가에 아득히 펼쳐진 백사장과 바다, 수평선을 배경으로 줄지어 박혀있는 검은 말뚝들을 보면서 수평의 여성성과 수직의 남성성이라는 2개의 단순한 조화에서 미술의 근본적인 시작을 새롭게 정의하기에 이른다. ‘그림이란 비례와 균형 이외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정의한 그는 빨강, 노랑, 파랑이 가장 기본적이며 유일하게 존재하는 색채라고 말했다. ‘노랑은 빛의 움직임이고 파랑은 창공이며 후퇴하는 것이고 빨강은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는 동양의 음양오행 이론과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몬드리안은 동양의 오방색과 동일한 색상으로 간단명료하게 그림을 그렸고 ‘차가운 추상’ 이라는 현대미술의 한 ‘류’를 탄생시켰다. 시간이 지나 결국, 몬드리안이 생각한 원리대로 ‘디지털카메라’나 ‘TV 브라운관’, 각종 사진인쇄 등이 수직 수평의 색점으로 만들어 졌다.

몽생미셸성에서 점심을 먹고 성의 구석구석을 관람했다. 이곳 역시도 썰물 때라 성이 있는 섬과 육지가 연결되어 있었다. 영화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이 만들어진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영화에서 백설 공주는 더 이상 남자의 키스를 기다리는 숲속의 잠자는 공주가 아니다. 계모로부터 버림받고 갇힌 첨탑 골방에서 체력을 튼튼하게 만들고 탈출하여 일곱 난장이와 민중의 힘을 모아 전쟁을 일으키고 아버지의 성을 탈취한다. 이 시대의 여성상을 대변하는 ‘스노우 화이트’는 천사장 미카엘(미셸)을 모신 이 아름다운 성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성의 정상까지 올라가서 아래를 보면 끝없이 펼쳐진 갯벌이 순천만의 백배는 더 되는 것 같았다.

몇 시간을 둘러보고 렌트카로 이동한 곳은 ‘옹플뢰르’(HonfIeur) 항구였다. 푹 자고 아침에 보는 이 항구는 꿈을 꾸는 듯이 환상적이다. 천년의 세월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 성당의 예배하는 모습, 그 앞에서 열리는 장터와 골목의 풍경이 아득한 옛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듯 했다. 파리 시내를 관통하는 센강은 ‘루앙’을 지나 하구에 이르러 이곳 ‘옹플뢰르’와 강 건너 ‘르 아브르’(Le Havre) 항구와 ‘애트르타’(Etretat) 절벽을 만나게 한다. 인상파의 시작이 된 모네의 1872년 11월13일 아침에 그린 ‘인상 해돋이’는 바로 이 지역 ‘르 아브르’ 항구를 그린 것이다.
이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 낭만파의 ‘드라크르와’, 사실파의 ‘쿠르베’, 신인상파의 ‘시냐크’, 야수파의 ‘마티스’를 비롯하여 문학의 ‘빅토르 위고’, ‘모파상’ 등이 이 지역을 좋아 했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옹플뢰르’에서 유명한 ‘노르망디교’(Pont de Normandie)를 넘어 프랑스 최대 무역항 ‘르 아브르’ 항구를 지나 ‘에트르타’(Etretat) 절벽을 보니 과연 절경이다. 모화상이 ‘코끼리’라고 묘사한 이 절벽은 모네가 그림으로 남겼다. 모네의 ‘에트르타의 거친바다’는 1864년에서 1886년까지 일곱 번의 방문 끝에 제작한 작품이다. 코끼리절벽이 잘 보이는 옆 언덕으로 올라가면 작은 목조교회가 있다. 모네는 이 작은 ‘성 카트린 교회’를 작품에 남기기로 했다. 에트르타 바다는 모네의 작품 제목처럼 거친 파도가 오랜 세월을 통하여 긴 해변을 온통 동그랗고 예쁜 몽돌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프랑스에 오면 놓칠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포도로 만든 와인과 사과로 만든 칼바도스다. 우리는 칼바도스 지방의 농장과 숙성창고를 방문했다. 끝없이 펼쳐진 사과밭과 자연의 채취가 흠뻑 살아있는 농장과 오래된 숙성 창고를 보면 이 술의 신선함이 피부로 다가온다. 이 술은 사과와 조금의 배를 섞어 숙성시키는데, 현장을 견학하며 직원의 설명을 들으니 오랜 장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프랑스의 깊은 예술은 프랑스의 와인과 칼바도스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창고에서 잠시 영상으로 보여주는 칼바도스 제작과정은 미디어 파사드로 제작해서 오크통들과 창고의 벽에 비춰서 음악과 함께 영상으로 보여줬다. 사르트르 성당의 미디어 파사드에 이어 연속으로 감동적이었다.

사무실에 들러 칼바도스를 시음하고 파리로 돌아오는 길에 ‘루앙’ (Rouen)에 들렀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본 모네의 ‘루앙성당’은 1892년부터 2년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빛에 따른 변화가 잘 표현되었다. 거대한 루앙성당을 보며 모네가 느꼈던 감동을 공유해보고 또 이곳에서 화형당한 ‘잔다르크’ (Jeanne d'Arc)를 생각하며 조금 떨어져 있는 ‘잔다르크 성당’으로 걸었다.

루앙은 로마 시대 때부터 존재했고 2,0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의 여신’ 또한 파리에서 제작, 분해되어 내륙 강변의 항구도시인 이곳 루앙으로 옮겨져 미국 맨하탄으로 출항한 것이다.) 프랑스의 북부는 노르만족(바이킹)의 침입이 잦고 그들의 주거가 많아서 북쪽 해안지방을 ‘노르망디’라고 한다.

루앙성당


프랑스의 샤를 3세의 포용정책으로 루앙을 노르만족에게 하사했고 루앙을 수도로 하는 노르망디 공국이 만들어 졌으며 많은 바이킹들이 이곳으로 와서 정착을 하게 되었다. 노르망디 공국의 그 유명한 정복왕 윌리엄1세는 1066년 영국을 정복하고 영국의 왕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노르망디 공국은 ‘프랑스 안에 있는 영국 땅’이 되는 셈이었기 때문에 300여 년 간의 잦은 분쟁이 일어났고 1338년부터는 100년 전쟁이 벌어진다.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역은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였고 이때 ‘프랑스를 구하라’는 계시를 받고 나타난 사람이 바로, 17세 소녀 ‘잔다르크’였다. 잔다르크는 전쟁에 이겨 프랑스를 지켜냈고 이는 국가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왕과 귀족들은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 민중의 영웅이 되어버린 이 소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동시에 영국은 패망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영국은 패전의 원인을 악마의 힘을 이용한 마녀의 짓(?) 때문으로 몰아갔고 양쪽의 필요충분조건으로 프랑스는 19세 소녀 잔다르크를 영국에 넘겨 화형을 당하게 만들었다.

이런 역사가 있는 잔다르크 성당은 그다지 높지 않은 배의 모양을 형상화해서 만들어져 낮게 자리하고 있었다. 잔다르크 성당 앞에는 회전관광차와 스케이트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거기서 아이들은 즐겁게 놀고 있었다. 허전한 한쪽 가슴을 쓸어내리고 우리는 렌트카에 몸을 실었다. 파리 근처에 있는 원자력발전소를 지나니 멀리 에펠탑이 보였다.

박계현 화가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