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60주년을 맞은 해, 항일 독립 운동가 214명이 늦게 광복절 훈포장을 받았다. 서훈은 민족의 얼이 의연함을 보여준 그분들에게 진작 돌아가야 할 몫이었다. 해방된 지 60년이 지나서야 서훈을 한다는 게 오히려 부끄러울 지경이었으며, 게다가 그 수가 많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건국 후 독립 유공자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발굴해서 적절한 절차를 밟아 서훈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아직 우리에게는 정리하고 바로 잡아야 할 과거가 많이 남아 있음을 능히 알 수 있다.

214명 중에는 사회주의 계열 47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남북 간 이념 대결이 빚어놓은 것이지만, 일제하에서 항일 독립 운동을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회주의 계열은 지금까지 서훈 대상에서 거의 제외되어 왔다. 과거의 3·1절에 서훈된 사람까지 합하면 금년에 104명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들이 서훈을 받은 셈이다. 뒤늦게나마 이념과 사상에 상관없이 오로지 독립 운동에 기여한 바에 따라 그 행적을 기리는 것은 반가운 역사 정리라 아니할 수 없으며, 역사에 누락된 반쪽을 복원하는 작업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컸다.

물론 남북 분단이라는 엄연한 현실 속에서 해방 후 북한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사람이 항일 독립 운동을 했다 해서 무조건 서훈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전력이나 좌파 성향이라는 이유만으로 독립 운동가를 외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제는 이념과 체제의 측면이나 국력의 측면에서 볼 때 과거의 남북대결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가 북한보다 우위에 있으므로, 더욱 전향적으로 잊혀진 독립 운동가들을 발굴하여 그 가치를 인정하고 기려야 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심지어 독립 운동가로 서훈된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남북 분단과 한국 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친일 행적을 은폐하거나 날조함으로써 사회의 주류를 차지했다. 공정한 기준에 의해 일제 잔재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터라 친일을 통해 얻은 기득권을 지닌 친일 세력에게 해방 공간은 신천지나 다름없었다. 반면 독립 운동가나 그 자손들은 해방 조국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도 사회 밑바닥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후손들도 부지기수다.

그때 하지 못했기 때문에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친일 청산,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말을 화두로 올리고 있는 것이다. 친일 잔재 청산은 해방 초기에는 과거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 당면한 문제였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그때 그 당면 문제를 해결했다면 지금 우리가 과거 문제에 집착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교훈에 비추어볼 때 오늘의 문제를 이유로 뒤로 물릴 일이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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