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영 칼럼니스트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오.” 라고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겨레의 가슴에 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기 위해 시작된 독립운동이 올해로 꼭 100주년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이다.

포항에서는 1919년 3월 11일, 12일 북구 여천동 옛 여천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열렸고 3월 22일에는 청하면, 3월 27일에는 송라면 대전리 일원으로 만세운동이 이어졌는데 경북에서는 우리 포항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우리 포항시민들의 자긍심을 한층 더 높여 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저명한 독립운동가도 많지만 사실 아무도 모르게 겨레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헌화한 잊혀진 무명의 의사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 중에 박상진 의사는 그 시절에 어려운 판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독립 운동가를 내 손으로 단죄할 수 없다.’며 임용을 거부하고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정말 감동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고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직이 아닌 판사직을 분토만도 못 하게 버린 그 기개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집안 또한 명문가였고 부인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경주에서 최부자의 땅을 밟지 않고는 경주 땅을 지나갈 수가 없다는 그 최부자의 딸과 혼인을 했다고 한다.

판사직을 포기한 후 박상진 의사는 독립운동가가 되어 1910년대 가장 활발한 운동을 했던 대한광복회를 만들었으며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을 지냈고 그 휘하에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유명한 김좌진 장군이 부사령관이었다고 한다.
대한광복회는 만주지역에 무장독립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친일파 근절을 위해 노력하다 박상진 의사는 1918년 체포되어 모진 옥고를 치르다 1921년 향년 38세의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

박상진 의사는 사형 집행 전 만세삼창을 한 뒤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세상에 다행히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가니 청산이 비웃고 녹수도 빈정거리구나"라는 짧은 절명시를 남기고 순국하셨다고 한다.

박상진 의사가 사형 당하고 박상진 의사의 가문은 모두 몰락하였고 광복 후에 박상진 의사의 부인이 차가운 방안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었다는 신문 기사가 났었다고 하는데 정말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박상진 의사는 돈, 명예, 모든 것을 갖추었지만 조국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으며 그 부인 또한 경주 최고의 부자집 딸로 자신에게 상속된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하나 남김없이 다 쾌척하였을 것인데 그 부인이 그것도 경주 최부자의 딸이었었는데 광복 후에 굶어 죽었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하며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고야 만다.

진짜 대우 받고 존경받고 잘 살아야 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가난하게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사실 아닌 것이다.

세월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 우리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우리는 우리들의 돈, 명예, 지위, 가족, 건강 등 이 모든 것들을 조국을 위해 초개처럼 버릴 수 있을까? 아무리 자문을 해 보아도 -절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답이 나올 뿐이다.

3·1운동은 민주주의, 평화, 비폭력의 정신이 빛난 독립운동이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나라 상실의 고통을 절감하고 독립 투쟁의 의지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선봉에 섰던 제2, 제3의 박상진 의사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존경받고 앙망 받아 마땅한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잊지 말고 재조명해야 하며 그들의 후손들을 잘 보살펴야 할 것이다, 국가가 할 수 없으면 지자체가, 지자체가 할 수 없으면 각 기업이나 단체들이, 각 기업이나 단체들이 할 수 없으면 개인적으로 자발적으로라도 그 후손들에게 보답에 보답을 하는 것이 순국선열에 대한 마지막 예우일 것이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