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달서구의원

다음날 북경에서 한단시까지 고속철과 버스를 타며 도착한 곳은 허난성_한단시邯鄲市_진기로예晉冀魯豫_열사릉원. 이곳에 1950년 10월 태항산 석문촌에서 이곳으로 이장되어 온 윤세주, 진광화 묘지가 있다.

중국 고대 춘추전국시대의 조나라의 수도 한단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 명당이었으며, 마치 공원과 같이 잘 꾸며져 있었다.. 많은 시민들이 산책을 하고 운동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북경의 항일 유적지와는 사뭇 달랐다. 위치를 정확히 파악치 못한 윤세주의 묘부터 찾기 시작했다. 얼마 후 답사단 중 한 명이 찾았다. 한글로 또렷이 적혀있었다.

윤 세 주 , 아! 가슴이 갑자기 뜨거워진다. 마음을 추스르고 한국에서 가져온 꽃과 술로 예를 다하였다.
​경남 밀양 출신의 윤세주는 어떻게 고향에서 수만리 떨어진 태항산 기슭에 영면하게 되었을까?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열단 창립멤버이자 조선의용군 윤세주는 1920년 19세로 의열단의 가장 어린 단원이었다.

10년 전 1910년 11월 3일 김원봉, 윤세주 두 어린이는 일왕의 생일 행사에 쓸 일장기를 변소에 처박아 버리는 ‘대불경’사건을 저지른 싹이 파란 독립군 꿈나무였다. 조선의용군의 선도자로서 그야말로 영웅적인 혈전을 전개하였다.

태항산 전투에서 윤세주, 진정화 두 열사의 희생의 대가로 퇴로를 확보한 중국공산당은 후일 두 열사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렀다. 윤세주는 남쪽 해방군 일반 열사 묘지에 안장되어 있었으며 10살 아래 공산당원이었던 진광화는 북쪽 장군 묘역에 안장되어있다. 정작 우리는 윤세주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등소평보다 낯선 윤세주가 아닌가! 타국 땅에 고이 잠드신 열사를 생각하니 문득 울컥한 심경이 되었다. 태극기를 펼치기에 마음을 졸이던 북경이 아니기에 마음껏 펼쳐 들며 두 열사를 가슴 깊이 새긴다.

이제 두 열사가 중국인의 가슴에 의혈을 새기듯 동북아 고대역사 노정의 발걸음을 디딘다.
먼저 허난성_안양_은허박물관. 은허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유적으로 기원전 13세기경 은나라 갑골문의 발현기이다. 3000년 전의 고대 도시의 찬란했던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

이날은 하남 휘현시 정부 시장의 초청으로 하남성 휘현시辉县市 태항산 주류그룹의 끝이 없이 펼쳐진 1톤의 고량주 술창고에서 심취해 고난의 항일 유적 탐방을 마무리한다.

셋째 날 다시 하남성으로 돌아와 개봉시開封市 송 왕조 청명상하도원를 견학하였다. 이곳은 중국 문화가 가장 융성한 꽃을 피웠던 송왕조 시대를 복원한 테마파크로 마침 주말이기도 하기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곳의 이야기 중심에는 악비장군이 있다. 그는 중국의 4대 명장이자 민족영웅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도 누명으로 생을 마감해 마치 우리나라의 이순신과 비교된다. 악비가 후세에 민족영웅으로 재조명을 받았듯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월북과 이념대립의 이력 때문에 대우를 제대로 못 받고 있는 조선의열단 김원봉, 윤세주, 진광화 와 같은 열사들도 하루빨리 명예 회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해본다.

버스를 타고 세계 문명의 발상지 황하유역 으로 가서 넓디넓은 대륙의 한가운데 몸으로 느끼는 지리환경과 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을 똥내음 향기롭게 만끽한다.

대평원 황토 강물과 목이 따가운 황토바람을 헤치고 중국의 마지막 밤을 하남사범대 소전유 부총장과 함께 했습니다. 소 부총장은 태항산 출신의 중국 근대혁명사 전공의 석학이다. 이번 항일역사탐방에서 양국의 의미를 함께 나누며 이후 학술대회를 함께 계획하게 되었다.

여정의 마지막 날 2019년 2월 24일은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을 출발하는 날이다. 북경을 지나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니 바로 옆 북경 역에서 기차를 타면 평양으로 바로 갈 수 있다. 이 어찌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100년 전 이 땅의 열사들 피로 이뤄진 독립이 100년이 가까이 올 때까지 떨어져 살고 있으니! 앞으로 100년을 위해, 동북아의 평화협력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