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보, 애일당구경첩 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
한국국학진흥원(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이 수집한 국학자료 규모가 51만 점을 돌파했다.

2001년 수집을 시작한 한국국학진흥원은 민간소장 국학자료는 지난해 월천선생 기념사업회로부터 도산의 월천서당에 보관돼 있던 고문서 270점을 기증받고, 올해 2천여 점이 추가되면서 51만 8천여 점을 기록했다.
이들 중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 지정등록 문화재급 자료만 7만여 점에 이른다.
작년 기준 국내 문화재로는 국보 제132호인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을 비롯해 보물 1천854점, 시도유형문화재 2천241점, 문화재자료 216점, 등록문화재 691점이 올랐다.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유교 책판이 6만4천226점, 201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52점, 2016년 5월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이 된 현판 550점, 2018년 5월 등재된 만인소 1점 등 기록유산도 6만4천829점에 달한다.
51만여 점 국학 자료의 실제적 소유자는 대부분 경북 북부권의 수많은 종가와 문중이다. 진흥원은 자료수집 초창기부터 자료 소유권은 기탁자에게 보장하고 진흥원은 관리권과 연구기능만 수행하는 기탁제 방식을 취해, 도난과 화재에 무방비로 노출된 민간소장 자료를 단기에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세계인들이 인정한 안동의 고문서의 매력 속으로 빠져 보자. < 편집자 주 >

◇ 류성룡 종가 문적(柳成龍宗家文籍)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종손가에 전래돼 온 문헌과 각종 자료들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60호로 지정됐다. 이 문화재는 당초 ‘안동 유씨 문서(安東柳氏文書)’라는 명칭으로 1963년 1월에 19권의 수량으로 지정됐다가, 1990년 명칭 등을 개정했다. 현재 경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유영하가(柳寧夏家)에 소장돼 있다.

▲서애 류성룡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했다.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했다.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했다.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전적과 문서
류성룡의 친필 문적(親筆文籍)·수록(手錄), 중국 장수의 시화첩, 유성룡의 호성공신녹훈교서(扈聖功臣錄勳敎書) 등 주로 임진왜란과 관련된 자료이다.
‘진사록’ 3책, ‘난후잡록’ 2책, ‘근폭집’ 2책, ‘중흥헌근’ 1책, ‘군문등록’ 1책, ‘정원전교’ 2책, ‘정조어제당장서화첩제문부 채제공발’ 2책, ‘당장시화첩’ 1책, ‘당장서첩’ 2책,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柳成龍備忘記入大統曆)’ 5책, ‘호성공신록훈교서’ 1장 등 11종 22책(점)이 있다.

▲역사적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며 임진왜란사 연구에 중요한 역사적 자료들이다. 명장들의 시화첩과 서첩, 유성룡의 친필 고본은 서예로서도 가치가 매우 높다. 이들 전적과 문서 가운데 ‘징비록(懲毖錄)’이 국보 제132호로, 광국공신녹훈교서(光國功臣錄勳敎書)·교지·교서 등이 유물과 함께 보물 제460호로 지정됐다. 미지정된 전적·고문서들도 지정 대상이 될 만한 것이 많다.

◇ 김성일 종가 고문서 (金誠一 宗家 古文書)
조선 명종에서 선조 때의 명신(名臣)이며 학자인 학봉(鶴峰) 김성일(1538∼1593)과 그의 선조, 아들 김집(金集), 손자 김시추(金是樞) 등의 후손들과 관련된 1390년(고려 공양왕 2)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문서이다. 고문서에는 학봉의 교지(敎旨)·교서(敎書)·유서(諭書)·소지(所志)·분재기(分財記) 등 1만여 점이 소장돼 있다. 이 중에 간찰(簡札)·제문(祭文) 등은 제외하고 특히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연구에 필요한 문서류만 선별, 17종 242점 1987년 3월 7일 보물 제906호로 지정됐다.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학봉 김성일 종손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학봉 김성일
김성일 선생은 선조 1년(1568)에 문과에 급제해 이조와 호조의 낭관을 거쳐 선조 9년(1576)에는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다. 선조 23년(1590)에는 통신부사가 돼 정사 황윤길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이듬해 2월에 일본에 다녀와서 황윤길은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김성일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보고했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은 처벌할 것을 명했으나 서애 유성룡의 변호로 풀려나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다. 학문적으로는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해 퇴계학파의 일가를 이뤘으며, 정치를 하는 동안에는 백성들의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정책을 폈다.
종손가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은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서인 교지, 교서, 유서, 재산분배기록인 분재기 등 1만여 점이나 되지만, 그 가운데 편지글과 제사에 쓰인 제문은 제외됐다. 지정된 문서를 보면 교서 1점(1592), 교지 및 첩지 59점(1564∼1834), 첩 4점(1630∼1678), 시권 7점(1564∼1844) 등이다.

▲지정목록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작성된 김천의 호구단자(戶口單子)를 비롯해 가정(嘉靖) 14년(1535)의 분재기(分財記) 및 김성일에게 발급된 교서(敎書)·유서(諭書)·유지(有旨)·교지(敎旨)·시권(試券) 등을 지정한 것이다.
교서 1점, 유서 1점, 유지 3점, 교첩(敎牒) 및 교지 59점, 차정첩(差定帖) 4점, 시권 7점, 시호서경(諡號署經) 2점, 품정절목(稟定節目) 1점, 입안문(立案文) 5점, 등장(等狀) 6점, 호구단 50점, 분재기 6점, 명문(明文) 25점, 완의 3점, 통문(通文) 56점, 치제문(致祭文) 1점, 설계도(設計圖) 3점 등이다.


▲역사적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중기와 후기, 말기의 사회·경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김성일 선생 개인의 전기를 파악함은 물론이거니와 의성김씨 가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교서와 유서는 임진왜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는 유지·교지·차정첩·시호서경 등과 함께 조선조 인사행정제도연구에, 분재기·명문·입안문·호구단자 등은 조선조 경제·사회·가족제도 등의 연구에 각각 중요한 자료들로 평가된다. 설계도는 숙종 때의 건축연구 자료이며, 통문은 주로 유림사회의 본산인 서원연구의 자료이다.

◇ 이현보 종가 문적 (李賢輔 宗家 文籍)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며 시조작가로 유명한 농암 이현보(1467∼1555)의 교지 고문서와 전적류, 회화류 등이다. 고문서류인 교지는 총 23매로, 연산군 4년(1498)∼명종 15년(1560) 사이의 것으로 이현보(14매), 이파(1매), 이문량(8매)과 관련된 교지들이다. 전적류로는 ‘애일당구경첩’으로 모두 2책으로 돼있다. 한 책은 당시 명사들의 친필로 쓴 시를 모아 하나의 첩으로 만든 것이다. ‘애일당구경별록’은 생일가를 포함한 국문가사 등 이현보의 작품과 행적을 별도로 모아 편성한 것이다. 회화류의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는 이현보가 동부승지로 재직시 승정원 관원 10명과 계모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1994년 7월 29일 일괄해 보물 제1202호로 지정됐으며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농암 이현보
연산군 4년(1498) 문과에 급제한 뒤 내직으로 예문관검열, 사간원정언과 외직으로 밀양과 안동, 충주 등지의 지방관을 지냈다. 이후 형조참판, 호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고 1542년 76세 때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말년을 고향에 돌아와 지냈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소재로 삼아 시조를 지은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 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지정목록
고문서는 교지류(敎旨類: 조선시대 임금이 4품 이상의 관리에게 주던 글)로 총 23점이다. 1498년(연산군 4)에서 1560년(명종 15) 사이의 것으로 이현보 14점, 이파(李坡) 1점, 이문량(李文樑) 8점 등 3인에게 발급한 백패(白牌: 소과에 급제한 생원·진사에게 주는 흰종이의 증서)·사령(辭令)·증직교지(贈職敎旨)와 교첩(敎牒)이다.
전적은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등 7종 8책이다. 애일당구경첩 상·하 2책, 애일당구경별록(愛日堂具慶別錄) 1책, 계사구로회첩부(癸巳九老會帖附) 1책, 분천강호록(汾川講好錄), 1책 농암유고초(聾巖遺稿草) 1책, 정동면례시일록부영정개모시일기(亭洞緬禮時日錄附影幀改摹時日記) 1책, 당음비사(棠陰比事) 1책 등이 있다.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는 1534년 승정원의 동료 관원들의 계모임하는 모습을 그린 계회도이다.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됐는데, 상단은 그림이고, 중단(中段)은 시이며, 하단(下段)은 계원(契員)의 관직·성명을 적은 좌목(座目: 좌석의 차례를 적은 목록)이 적혀 있는데, 도승지 남세건(南世健) 등 9인이다. 이현보는 당시 전 우부승지(右副承旨: 승정원의 정3품 벼슬의 하나)로 참여했다.

▲역사적 의의와 평가
‘애일당구경첩’은 2책으로 돼 있다. 한 책은 당시 명사들의 친필로 쓴 시를 모아 하나의 첩으로 만든 것이다. ‘애일당구경별록’은 생일가를 포함한 국문가사 등 이현보의 작품과 행적을 별도로 모아 편성한 것이다.
회화류의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는 이현보가 동부승지로 재직시 승정원 관원 10명과 계모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훼손이 심하기는 하나, 다른 계회도와는 달리 ‘은대계회도’가 처음 발견됐다는 점에서 계회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교지 등의 자료는 조선 전기 인사행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들로써 평가되며, 전적류들은 국문가사와 국문학 연구 자료로 중요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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