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산책]

이종암 시인·대동고 교사

우리에게 가을이라는 계절을 처음 입에 물고 오는 게 코스모스와 귀뚜라미라면 가을의 절정을 빛내고 있는 꽃은 국화요, 과실은 사과라고 할 수 있겠다. 찬바람 불고 서리가 내리는 가을 숙살(肅殺)의 기운에도 시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자양분 삼아 노란 꽃을 피워 올리는 게 국화(菊花)다. 지금쯤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사 앞뜰에 국화가 한창이겠다.

국화 허리가 물들어서

정강이는 시들어서

거기 절을 짓고 굴을 파고

향기처럼 소멸을 빌다 보니

동백이 오고 있다

고창군 선운리 선운사

법고 소리,

둥구둥구둥둥둥둥둥 딱 둥둥 둥구 둥둥둥 따기따기 둥둥

국화 정강이 슬퍼서 절을 짓고 빌다보니

동백이 오고 있다

동백 속에 또 절을 짓고 빌어서

국화를 부르리

고창군 선운리 선운사

꽃밭 두드리는

법고 소리,

-장석남,「고창군 선운리 선운사」전문.

몇 해 전 가을에『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 주세요』(시와시학사,2008)라는 좀 특별한 시집 한 권이 발간되었다. ‘책머리에’서 편자(編者) 김화영은 이 시집을 두고 “무심히 걷는 길가에서 조우한 꽃과도 같은 것”이요, “길 위에서 얻은 무위(無爲)의 산물”이라 했다. 그 길가, 길 위가 바로「선운사 동구」시비가 서 있는 곳,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 옆 마을에 있는 전북 고창 선운사이다. 이 시집은 이른바 “미당과 선운사와 시를 잇는 책”이다. 이 책 속에는 미당의 시는 물론, 선운사에 주석했거나 놀다 간 선승과 시인 묵객들의 시편들, 그리고 우리 시대 여러 현역 시인들의 선운사와 연(緣)을 닿고 있는 많은 시편들이 꽃처럼 피어나 있다.

미당과 선운사를 노래한 시집 속의 많은 시편들 가운데 장석남의 위 시가 단연 수작(秀作)이었다.

“향기처럼 소멸을 빌다 보니/동백이 오고 있다”라는 시구를 읽다 내 몸이 다 서늘해졌다. 향기처럼 ‘소멸’을 비는 저 사내는 정녕 한 소식을 얻은 작자임에 분명하리. 시의 중간부에 “둥구둥구둥둥둥둥둥 딱 둥둥 둥구 둥둥둥 따기따기 둥둥”이라고 좀 길게 표현된 “고창군 선운리 선운사/꽃밭 두드리는/법고 소리”가 국화를 부르고 동백을 부르고, 또 이 시집 속의 아름다운 노래들을 불러 온 것인가. 재미없는 작금의 살림을 작파해버리고 저 “꽃밭 두드리는/법고 소리”속으로 남몰래 들어가 새 살림을 차리고도 싶다.

2010년 제10회 미당문학상 수상자 장석남 시인은 제 7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2012)을 묶으면서 위 시를 제목도 「고창 선운사」로 바꾸고, 내용도 대폭 축약해서 싣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앞의 시에서 선운사 법고 소리도 더 크게 들리고, 국화 향기도 더 진하게 나는 것 같다.

대구에 사는 여류 시인 김승해는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에서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고 선언했다.

“소백산엔/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푸른 사과 한 알, 들어 올리는 일은/절 한 채 세우는 일이라/사과 한 알/막 들어 올린 산, 금세 품이 헐렁하다//나무는 한 알 사과마다/편종 하나 달려는 것인데/종마다 귀 밝은 소리 하나 달려는 것인데/가지 끝 편종 하나 또옥 따는 순간/가지 끝 작은 편종 소리는/종루에 팽팽한 뿌리로 모아/풍경 소리를 내고 풍경 소리를 내고/급기야 안양루 대종 소리를 내고 만다//어쩌자고 소백산엔 사과가 저리 많아/귀 열고 산문(山門) 소식 엿듣게 하는가”(-김승해,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전문)

시의 제목처럼 영주 부석사가 있는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고 사과가 빨갛게 익어가는 늦가을의 부석사가 제일로 예쁘다.

이 시를 이해하는 핵심은 2행에 있다.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고 보는 시인의 새롭고 깊은 시선에서 작품의 뼈대는 세워진다. 시인의 말처럼 푸른 사과를 붉은 사과로 들어 올리는 일은 절 한 채 세우는 일과도 같다. 부처가 깨우친 생명과 우주의 진리는 세계 곳곳에 스며있다. 나무에 매달린 사과 한 알 또옥 따는 순간, 그 소리가 ‘편종 소리→풍경 소리→안양루 대종소리’로 이어지는 소리의 이미지 확산은 시인이 1연에서 찾아낸 진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리라. 마지막 행(行)에서 산문(山門) 소식 엿듣는다 했는데 차라리 화자가 산문(山門) 속으로, 사과나무 속으로 걸어들어 갔으면 어떨까.

사족 한 마디 첨언한다. 흔히들 부석사가 소백산에 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말이다. 부석사가 있는 곳은 태백산 산줄기에 있는 봉황산이다. 안양루에서 멀리 건너다 보이는 연이어 내달리는 산줄기가 바로 소백산이다.

가을 부석사,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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