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화 수필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유로울 때 사람은 행복하다. 나는 요즘 두 발과 손이 묶인 느낌으로 책을 읽고 있다. 내 안에 도무지 상상이란 게 일어나지 않는다. 독서의 맛은 밋밋하고 감흥이 없다. 마치 마음에 쏙 드는 멋진 이성을 만났지만 감정에 변화가 없는 것과 같다. 불이 붙을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다. 나 스스로 이런 상황을 자초했으니 할 말이 없긴 하다.

얼마 전에 아들에게 갔을 때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천재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생애와 작품이 실린 ‘모딜리아니, 열정의 보엠’이었다. 그의 친구 앙드레 살몽이 쓴 책이다. 글도 관심거리지만 모딜리아니 그림의 특징인 목이 길게 늘어진 여인들의 초상화에 매력을 느껴서이기도 하다. 자라목처럼 짧은 나로서는 목이 긴 여인들을 마음껏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하다. 그는 그림의 색조와 형태를 만들어 내는 일에 남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어 그림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도 빠져들기 일쑤다.

책장에서 새 책 같은 '헌책'을 뽑아 들고 주인에게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처럼 저자세가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나의 허접한 독서 습관 때문이다. 밑줄 긋기는 물론 어느 때는 책이 노트나 낙서장이 되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책 낱장의 아래위의 여백에 독후감이나 참고 사항, 독서 중에 만난 영감의 흔적을, 심지어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까지 남긴다. 이쯤 되면 책이 아니다.

아들은 새 책처럼 깨끗하게 읽는다. 어미가 읽을 때 남긴 흔적이 때로는 방지 턱처럼 속도와 작가와의 교감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독서 중에 일어나는 상상력을 약화시킨다고 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몹시 미안해하면서 조심할 것을 약속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은 노트로 변해가고 있다. 이런 일로 어느 때는 아들의 공간에 금족령까지 내려진 일도 있었다.

나의 얄궂은 독서 습관은 시간의 극빈자로 전락하면서 그 증세가 더욱 심해진 것 같다. 책 전체를 재독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는 밑줄 긋기와 메모는 쉽게 기억을 되살릴 수 있어 내 입장에서는 효율적인 독서법이기에 반복하다 보니 습관이 된 것이다. 아들 책뿐만 아니라 도서관의 책을 빌리는 일은 엄두도 못 낸다. 이젠 아들이 장성해 독립한 지 꽤 되어 별로 부딪칠 일이 없다. 그런데 지난 1월에 아들에게 갔을 때 문제의 책이 내 눈에 걸려들었다.

얄궂은 어미의 습관을 탓하며 책을 빌려줄 수 없다는 말을 나이가 꽉 찬 아들이 할 수는 없음을 안다. 그래서 조심하고 조심하면서 읽자니 불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음식처럼 독서도 정신이 자유롭지 못하면 소화불량이 온다. 이미 희한한 독서습관을 몸도 인식을 해버린 것인지 어느 순간 내 의지를 단숨에 살짝 넘어버리는 반칙을 해버렸다.

책장을 넘기는 데 뭔가 야릇한 기분이다. 도대체 이 느낌은 뭐지? 하는 순간 이미 여남은 장 정도 밑줄을 긋고 있지 않은가. 갑자기 머릿속이 바빠진다. 손녀 같은 조카에게 선물 받은 '찹쌀지우개' 지원군이 떠오른다. 흔적을 없애려 지우기를 반복한다. 멀리 있는 아들이 옆에 서서 눈이 감기도록 웃고 있는 것만 같다.

버릇이 되면 유익한 것도 있지만 나의 독서 습관은 여러모로 불편을 준다. 오랫동안 소장하고 싶은 책은 깨끗이 읽느라 긴장되어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요즘처럼 책값이 비쌀 때는 도서관을 이용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그것을 알면서도 무시로 클릭한 대가로 인터넷 서점이 날리는 청구서는 나의 통장 잔고에 부담을 준다.

참으로 궁금한 것은 새 책처럼 깨끗이 읽는 사람들이 나보다 정확하게 오랫동안 기억하는 일이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에 밑줄을 긋는 것일까? 세계적인 석학들이 줄을 그으면서 독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정작 줄긋기 선수인 나는 요즘 기억력마저 더 떨어지는 것 같아 기가 꺾인다. 구순에 이른 김동길 선생을 보면 기가 막힌다. 순식간에 수많은 시가 소나기처럼 쏟아질 때는 마술을 보는 것 같다. 세상에 쉽게 얻어지는 일이 있을까.

젊은 날 좋은 습관을 들이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자유롭고 누릴 수 있는 것 또한 많을 것이다. 매사에 자유를 갈구하는 나는 모순되게도 허접한 독서습관의 그늘에서 부자유를 느낄 때가 많다. 비단 독서습관뿐이겠는가. 바람직하지 못한 식습관의 그늘도 마찬가지다. 평생 다이어트를 하느라 학위증 없는 박사가 되어 있다. 두 가지 습관 모두 이제는 나와 하나가 된 듯하여 내가 누리는 자유는 늘 팔 할이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