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길 시인·평론가
미국 몬태나주 강가 플라이타잉(fly-tying, 제물낚시)을 배경으로 가족 간의 자잘한 일상과 사랑이 잔잔하게 묻어나는 영화였다. 물론 폴의 느닷없는 노상 죽음이 불러온 아버지 맥클레인, 형 노만 등 가족의 고뇌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필자가 특히 눈여겨본 것은 비록 사랑하는 사람을 길거리 폭력에 졸지에 잃은 그들이지만 그래도 영화 끝까지 끈끈한 가족애가 깊이 느껴졌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인생은 예술품이 아니다"란 아버지 맥클레인의 말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네 삶은 티 하나 없이 깎은 듯한 대리석 신전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닳고 닳은 문턱 혹은 비루한 때가 꼬질꼬질한 장터가 본질에 가깝다. 그래서 누구나 지닌 그 나름의 가치와 절실함이, 각자 생에서 맞닥뜨린 빛과 어둠의 굴곡을 얼마나 곡진하게 통과했느냐에 방점이 가는 것이지 결점의 많고 적음은 부차적일 뿐이다. 그리고 설사 그 결점이 아무리 커도 그를 둘러싼 가족 간의 유대와 사랑이 공고하다면 결국 극복 가능하다.
그래서 영화 속 마지막 설교 자리에서 한, 맥클레인 목사의 말 가운데, 가족 간에는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 못 해도 우리는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란 구절은 전 세계 수많은 관객들 가슴에 지금껏 사향처럼 향기롭게 반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1997년 온 나라가 참혹한 IMF 사태를 겪기 불과 2년 전 1월, 빚에 내몰린 일가족이 속초 영랑호에서 자살했다. 그들을 애도하며 속초의 시인 이상국은,
"그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 빚에 쫓겨 온 서른세 살의 남자가 /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
/ 고니나 청둥오리들은 / 겨우내 하늘 어디선가 결 고운 물무늬를 물고 와서는 / 뒤뚱거리며 내렸으며 / 때론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
/ 얼음꽃을 물고 / 수천 마리 새떼들이 길 떠나는 밤으로 / 젊은 내외는 먼 화진포까지 따라 나갔고 / 마당가 외등 아래서 /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 그러나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이상국, '물속의 집' 부분)
이처럼 시인은 몹시도 가슴 아파하며 물기 그득한 더운 시선을 보여준다.
필자도 역시 시를 읽는 내내 눈앞이 흐려져 어쩔 줄 몰랐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 안타까움만큼이나 격렬한 노기가 열기를 더해오는 것 또한 어찌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필자의 또 다른 전공인 평생교육과 청소년학에 기인한 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편의 상식만으로도 부모와 자녀는 피와 사랑으로 맺어졌지만 엄연히 독립된 인격체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도대체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에 빠졌다손 쳐도, 열 번 백 번을 양보해도 부모의 잘잘못을 그 자녀에게 떠넘기거나 추궁하는 것은 지극히 비윤리적이고 부조리하고 부당하다. 하물며 스스로를 죽이는 것도 용납하기 힘든데, 그 죽음에 어린 자녀들의 동반이라니. 그 후 몇 날 며칠을 더 곱씹어도 내 노여움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지난 2008년 중국 쓰촨성(四川省) 대지진 당시 무너진 건물 벽 보도화면에 비춰져 다시 한번 세간이 주목했던 노자사상의 핵심키워드다. 노자 도덕경 8장의 시 구절이기도 한 '상선약수(上善若水)'는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물처럼 사는 것이란 뜻이다.
그것은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고 결코 남과 다투지 않고 경쟁하지 않으며 눈앞의 굴곡에 맞게 자기를 맞추어 흐르듯 우리 삶도 늘 그렇게 자연스럽고 겸손하게 살면, 물이 마침내는 바다나 호수처럼 깊이가 생기듯 사람의 마음도 모두를 포용하는 아름다운 깊이를 갖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앞서 영랑호에서와 같은 비보는 그 이전에도 간간 있었지만 문제는 이후에도 잊혀질만하면 되풀이되었다. 그 같은 비극이 불과 얼마 전 어린이날 또 일어났다. 경기 시흥의 은행동 한 농로 SUV 차량에서 광명시의 30대 A씨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빚 7,000만 원 때문이란 후문이다.
고인이 된 젊은 부부도 안타깝지만, 2살, 4살 자녀의 동반 주검에는 그저 목이 메어 올 뿐이다. 사랑하는 어린 자녀만 두고 가기에는 차마 발길이 안 떨어졌으리라. 그 애틋함이 짐작은 가지만 진정한 자녀 사랑은 결단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망자들의 고통과 절망을 그 누구도 짐작하거나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몇몇 보도에서 그들에게도 제도적으로 그 빚을 해결할 길이 있었다는 뒤늦은 지적이다. 더욱 통탄할 일 아닌가? 정작 절박한 당사자가 접근도 못 해보는 제도라면?
그렇다. 이제 더는 이런 동반의 비극을 속수무책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 해결책을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개별 가족의 사랑과 헌신적 노력에 떠넘겨 당자 해결 원칙을 고집하기엔 우리 소시민적 실상은 그 도를 넘었다. 이젠 사회와 국가가 보다 적극적으로 소맬 걷어붙이고 나서야 할 시점이다. 그래야 저 말라붙은 가족애를 되살리고 서로 서로의 삶을 북돋아 주는 '상선약수'를 시도라도 해볼 게 아닌가. 그게 국가나 사회조직의 존재 이유지 않은가.
대경일보
webmaster@d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