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길 시인·평론가

지난 1992년에 나온 명장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흐르는 강물처럼'은, 배우 브래드 피트가 스코틀랜드 출신 목사 리버런드 맥클레인의 자녀 중, 자유로운 영혼의 아들 폴로 열연해 필자에겐 무척 깊은 인상을 주었다.

미국 몬태나주 강가 플라이타잉(fly-tying, 제물낚시)을 배경으로 가족 간의 자잘한 일상과 사랑이 잔잔하게 묻어나는 영화였다. 물론 폴의 느닷없는 노상 죽음이 불러온 아버지 맥클레인, 형 노만 등 가족의 고뇌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필자가 특히 눈여겨본 것은 비록 사랑하는 사람을 길거리 폭력에 졸지에 잃은 그들이지만 그래도 영화 끝까지 끈끈한 가족애가 깊이 느껴졌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인생은 예술품이 아니다"란 아버지 맥클레인의 말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네 삶은 티 하나 없이 깎은 듯한 대리석 신전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닳고 닳은 문턱 혹은 비루한 때가 꼬질꼬질한 장터가 본질에 가깝다. 그래서 누구나 지닌 그 나름의 가치와 절실함이, 각자 생에서 맞닥뜨린 빛과 어둠의 굴곡을 얼마나 곡진하게 통과했느냐에 방점이 가는 것이지 결점의 많고 적음은 부차적일 뿐이다. 그리고 설사 그 결점이 아무리 커도 그를 둘러싼 가족 간의 유대와 사랑이 공고하다면 결국 극복 가능하다.

그래서 영화 속 마지막 설교 자리에서 한, 맥클레인 목사의 말 가운데, 가족 간에는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 못 해도 우리는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란 구절은 전 세계 수많은 관객들 가슴에 지금껏 사향처럼 향기롭게 반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1997년 온 나라가 참혹한 IMF 사태를 겪기 불과 2년 전 1월, 빚에 내몰린 일가족이 속초 영랑호에서 자살했다. 그들을 애도하며 속초의 시인 이상국은,

"그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 빚에 쫓겨 온 서른세 살의 남자가 /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
/ 고니나 청둥오리들은 / 겨우내 하늘 어디선가 결 고운 물무늬를 물고 와서는 / 뒤뚱거리며 내렸으며 / 때론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
/ 얼음꽃을 물고 / 수천 마리 새떼들이 길 떠나는 밤으로 / 젊은 내외는 먼 화진포까지 따라 나갔고 / 마당가 외등 아래서 /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 그러나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이상국, '물속의 집' 부분)

이처럼 시인은 몹시도 가슴 아파하며 물기 그득한 더운 시선을 보여준다.

필자도 역시 시를 읽는 내내 눈앞이 흐려져 어쩔 줄 몰랐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 안타까움만큼이나 격렬한 노기가 열기를 더해오는 것 또한 어찌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필자의 또 다른 전공인 평생교육과 청소년학에 기인한 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편의 상식만으로도 부모와 자녀는 피와 사랑으로 맺어졌지만 엄연히 독립된 인격체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도대체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에 빠졌다손 쳐도, 열 번 백 번을 양보해도 부모의 잘잘못을 그 자녀에게 떠넘기거나 추궁하는 것은 지극히 비윤리적이고 부조리하고 부당하다. 하물며 스스로를 죽이는 것도 용납하기 힘든데, 그 죽음에 어린 자녀들의 동반이라니. 그 후 몇 날 며칠을 더 곱씹어도 내 노여움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지난 2008년 중국 쓰촨성(四川省) 대지진 당시 무너진 건물 벽 보도화면에 비춰져 다시 한번 세간이 주목했던 노자사상의 핵심키워드다. 노자 도덕경 8장의 시 구절이기도 한 '상선약수(上善若水)'는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물처럼 사는 것이란 뜻이다.

그것은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고 결코 남과 다투지 않고 경쟁하지 않으며 눈앞의 굴곡에 맞게 자기를 맞추어 흐르듯 우리 삶도 늘 그렇게 자연스럽고 겸손하게 살면, 물이 마침내는 바다나 호수처럼 깊이가 생기듯 사람의 마음도 모두를 포용하는 아름다운 깊이를 갖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앞서 영랑호에서와 같은 비보는 그 이전에도 간간 있었지만 문제는 이후에도 잊혀질만하면 되풀이되었다. 그 같은 비극이 불과 얼마 전 어린이날 또 일어났다. 경기 시흥의 은행동 한 농로 SUV 차량에서 광명시의 30대 A씨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빚 7,000만 원 때문이란 후문이다.

고인이 된 젊은 부부도 안타깝지만, 2살, 4살 자녀의 동반 주검에는 그저 목이 메어 올 뿐이다. 사랑하는 어린 자녀만 두고 가기에는 차마 발길이 안 떨어졌으리라. 그 애틋함이 짐작은 가지만 진정한 자녀 사랑은 결단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망자들의 고통과 절망을 그 누구도 짐작하거나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몇몇 보도에서 그들에게도 제도적으로 그 빚을 해결할 길이 있었다는 뒤늦은 지적이다. 더욱 통탄할 일 아닌가? 정작 절박한 당사자가 접근도 못 해보는 제도라면?

그렇다. 이제 더는 이런 동반의 비극을 속수무책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 해결책을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개별 가족의 사랑과 헌신적 노력에 떠넘겨 당자 해결 원칙을 고집하기엔 우리 소시민적 실상은 그 도를 넘었다. 이젠 사회와 국가가 보다 적극적으로 소맬 걷어붙이고 나서야 할 시점이다. 그래야 저 말라붙은 가족애를 되살리고 서로 서로의 삶을 북돋아 주는 '상선약수'를 시도라도 해볼 게 아닌가. 그게 국가나 사회조직의 존재 이유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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