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하모니카 소리에 가던 길을 멈춘다. 좁은 골목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한없이 투명하지만 쓸쓸하다. 오월의 담장에 만개한 붉은 줄장미 사이로 무채색의 고독과 절망을 끌어안은 듯한 소리다.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없어야 할 때 내는 소리거나, 반드시 잘되어야 한다는 좋은 마음이 숨통을 조여 올 때 내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니다. 곁에 아무도 없으니 침묵이 두렵다는 어떤 말같은 흐느낌인지도 모른다. 눈앞에 대화 상대가 없는 상태라고 해서 마음 속 말들이 잠들어 있는 건 아닐테니까. 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기에 매인 것 없이, 집착하는 일 없이 선선히 떠나지 못하는 마음이라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곧 이 동네를 떠난다는 하모니카 소리의 저 사내도 한때는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중년의 절반을 타고난 사업수단과 후덕한 인품으로 성공해 눈 부시게 빛났다. 처자식만큼은 부족함없는 삶을 누리게하리라 앞만 보고 달리면서도 주위를 둘러보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비록 흙수저로 태어났어도 덕을 갖춘 사내의 겸손은 무형의 자산이 되어 그 흙을 털어내고 금을 입힌 수저로 변신해 성공한 삶을 완성하는 듯 했다.
적절한 욕구, 적당한 소망은 때론 우리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원동력에도 적절한 제어(制御)는 필요하다. 사람의 욕심이란 고장난 기관차와도 같아 달리기만 하다 낭패를 당한다. 그 역시 성공의 오르막에서도 더 달리고 싶어했고 더 큰 왕궁에 ‘덕’대신 ‘부’를 쌓고 싶어했다. 평정심을 잃었고 타협을 하지 못했다. 대기업의 작은 하청업으로 시작한 사내의 회사가 비대해질수록 비례해 인생과 인간의 근본인 덕을 갖춘 겸손은 잃어갔다.
탁월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과 커다란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에게는 예외없이 누군가가 곁에 있었다. 더구나 세상살이 불화와 우격다짐으로 비바람으로 휘몰아쳐도 덕을 쌓아온 사람곁에는 좋은 관계의 그 누군가들이 더 많은 건 인지상정이다. 우리의 일생도 누구와 함께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사업이든 연애든 사람과 사람의 여러형태의 만남은 경이로운 일이며 축복과 감동이기 때문이다.
사내에게 처음 그 누군가는 소중한 자산이요 축복이었다. 덕을 쌓아 본 사람만이 바라볼줄 아는 혜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덕을 갖춘 겸손을 잃은 그의 눈에 이제 그 누군가는 ‘을’ 이라는 미미한 존재일뿐이었다. 겸손은 우리의 내성을 키워 외유내강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부드러움과 강인함이 결합해야만 비로소 어떤 환경에서도 참고 견디는 그 어떤 힘이 나온다는 덕을 갖춘 겸손. 그 힘을 잃은 사내가 흔들리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균형을 잃어버린 가정은 흔들렸고 그 누군가들이 떠난 회사는 주저앉고 말았다.
어느 봄비 내리는 밤. 두꺼워지는 침묵이 싫다며 홀연히 대문을 열고 나간 아들은 몇 년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 생사를 알지 못해 애를 태우는 아내도 누워 신음중이다. 설상가상 냉정하리만치 이 모든 상황을 다독이던 모친마저 불현 듯 세상을 떠나버리자 사내는 혼자가 되었다. 사내에게 불어닥친 마음의 태풍을 함께해줄 이는 이제 어디에서도 없다. 슬픔은 오롯이 사내만의 몫으로 남았다.
우리는 다양한 슬픔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공감과 연민의 농도는 다 다르다. 타인의 슬픔에 동화되어 나의 슬픔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는가 하면 그 슬픔에 가치조차 부여하기를 꺼리는 경우도 있다. 슬픔은 나를 넘어선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기초로 한다. 보편적인 인간의 비애로 심화되면서 존재론적 깊이를 더하기도 한다. 지난한 삶의 여정에서 우리가 배울만한 가장 소중한 것도 타인의 슬픔이고, 배우기 가장 어려운것도 타인앞에 놓인 슬픔인 것을 보면 말이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앞에 초연할 수 없는 것은 바람이 바람으로 오듯, 슬픔은 나눠 본 사람만이 슬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에 슬픔은 층층이 스며들어 더 없이 버겁기만 하다. 그러나 기쁨보다 슬픔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는 힘이 있어 좌절을 극복하는 기술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게도 해준다. 크나큰 슬픔도, 기나긴 슬픔도 때로는 내 삶의 원천이며 원동력이 될 수있기 때문이다. 슬픔이 있기에 인생을 돌아보고, 동지의 고마움도 알고, 떠나간 것들의 이름도 다시 한번 불러볼수 있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슬픔도 함께 나눠볼 일이다. 비난하거나 상처를 덧나게 할 일은 아니다. 슬픔은 더 큰 힘이되어 모두가 힘을 얻을 수 있을테니까.
또 다시 돌아온 사월은 꽃 대신 노란 리본의 기억으로 울음이 만개했다. 오래 전, 사월에 모두가 몸살처럼 앓았던 노란리본의 시린 잔상은 아직도 남아 만개한 오월의 장미앞에서도 더 이상 경이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저 마음이 닿는 곳마다 그리움뿐이었다. 머리는 ‘해결할 수 없으면 놓아야 한다’ 고 지시하는데 말을 듣지 않는 마음은 아직도 어떻게든 이 슬픔을 해결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싶어 한다. 결코 편안하다 할 수 없는 그들의 삶이 다시 겹치는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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