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운 환동해연구원 원장

입암서원(立岩書院)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산21번지에 있다. 죽장면에서 상옥으로 가다보면 약 2km떨어진 곳에 입암리가 있다. 북쪽으로는 드높은 토월봉(吐月峯)이 솟아 있고, 그 산자락에 부채처럼 펴진 곳에 마을이 자리하며 앞에는 맑은 가사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길지다.

서원 앞에 흐르는 천(川)이 가사천이고, 당당하고 위엄 있게 서 있는 큰 바위가 선바위 즉 입압(立巖)이다. 이러한 연유로 마을 이름을 입암리(立岩里)라 한다. 보통 입암이나 선바위로 부르지만, 이곳에선 탁립암(卓立岩)이라 부른다. 입압(立巖) 바로 옆 산기슭에 가사천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일제당(日躋堂)이 있고, 오른편 언덕에는 만활당(萬活堂)이 있으며, 만활당 옆 산기슭을 돌아서면 바로 입암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서원의 왼편 언덕에는 300년이 넘은 은행나무와 향나무가 있고, 동봉(東峰) 권극립(權克立)의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입암서원 건너편 가사천 주변에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시비(詩碑)가 있다.

입암서원(立岩書院)은 1657년(효종 8)에 현재 죽장면 입암리 토월봉(吐月峯) 아래에 창건된 것으로 지방유림의 공의로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3년(숙종 29)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 1567~1616)을 추가 배향하고, 그 뒤 동봉(東峯) 권극립(權克立, 1558~1661)·우헌(愚軒) 정사상(鄭四象, 1563~1623)·윤암(綸庵) 손우남(孫宇男, 1564~1623)을 모시게 되었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입암(立巖)에 대한 기문>을 보면 임진년(1592)에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동봉(東峯) 권극립(權克立)·우헌(愚軒) 정사상(鄭四象)·윤암(綸庵) 손우남(孫宇男)이 노년을 마칠 장소로 삼고자 이 골짝에 들어와 살았다. 또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에게도 자신들과 함께할 것을 권유했다. 여헌 역시 이를 승낙하고, 군자가 정신을 기르고 본성을 기를 수 있는 곳이라 하였다.

특히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은 이곳 풍치가 뛰어난 대표적인 스물여덟 곳을 이름 짓고 시로 읊었다. 그 후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를 비롯한 많은 문객(門客)들이 ‘입암 28경(立巖二十八景)’을 소재로 시문을 남겼다.

노계 선생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교분이 각별하여 이 고장에 머물던 69세의 선생을 찾아 죽장에 왔다가 입암의 절경에 감탄하여 <입암이십구곡(立巖二十九曲)>과 <입암별곡(立岩別曲)>을 남겼다. 노계문학 중에서도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의 선비문화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경치가 뛰어나고 유서 깊은 입압서원에서 마침 포항 문화재단은 법정 문화도시 포항 예비사업의 첫 시작의 일환으로 노계 박인로의 ‘입암별곡’에 ‘산이 반 쯤 꽃으로 만발할 때, 여헌 선생을 청하노라’라는 구절을 모티브삼아 인문활동 프로그램인 ‘신 입암별곡’을 4월 20일부터 6월초까지 진행했다.

여헌 장현광의 역으로 초대된 인사는 전, 현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들이다. ‘신 입암별곡’으로 포항을 찾는 장관들의 면면을 보면, 전국적으로도 전례가 없는 유명 인사들이다. 전 문화체육관관광부 장관을 지낸 영화배우이자 소리꾼인 김명곤 장관, 정통 문화 관료 출신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유진룡 전 장관, 얼마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마치고 국회의원으로 복귀한 도종환 장관 등이다.

이번 포항문화재단에서 진행한 ‘신 입암별곡’으로 입암서원에 대한 많은 홍보 효과가 있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내적 결실이다. 입암서원의 내력이라든가 장현광, 정사진, 권극립, 정사상, 손우남에 관련된 분야의 지역학자들이나 연구자들을 초청해 그들의 삶과 행적, 지역에서의 의의 등을 밝혀내 지역문화 콘텐츠 개발의 발판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