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아이는 훌쩍 자라 나타났다. 공원 풍경을 죄다 담은 듯한 편안한 눈이며, 보송보송하던 두 뺨의 털도 바람에 폴폴 날렸다. 고사리 손으로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백일장에 들어서던 햇병아리 같던 작년 아이는 아니었다. 여전히 호기심 충만한 눈동자는 쉴새없이 백일장 여기저기를 탐하고 있었지만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다.

또래 아이들과 돗자리를 들고 수다를 떠는 잠깐의 여유로움도 보였다. 하얀 프릴 원피스를 나폴거리지만 백일장을 대하는 아이는 표정은 침착했다. 길게 선 원고지의 대열에서도 차분했다. 멈칫거리며 어머니의 등뒤로 자꾸 숨어들던 작년 아이는 분명 아니었다. 백일장이란 글밭의 분위기를 조용히 탐색하며 느끼고 있는게 틀림없어 보였다. 일년이라는 성장의 시간은 아이에게 그저 지나가는 시간만은 아니었다.

살짝 비켜간 시선이지만 원고지를 건네주며 나는 “안녕” 이라며 안부를 물었다. 동그란 아이의 눈이 잠깐 헤매는가 싶더니 이내 깊숙이 고개숙여 답례한다. 뜻밖의 재회에 놀란 반가움의 인사다. 그리곤 재빨리 그늘속을 찾아 들어가는 아이의 등 뒤로 나는 무한한 응원의 시선을 보낸다.
‘그래 잘 하고 있어. 작년이 있었기에 오늘 이만큼 성장한 너가 있는 거야.’

우리에게는 스치듯, 혹은 진하게 조우했던 모든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은 곧 사라졌거나 사라져간다. 그리고 새로운 만남과 의미는 또 다시 찾아온다. 저 아이와의 인연도 그랬다. 작년 이맘때 초등학교 새내기였던 아이를 만난 건 어느 백일장에서였다. 유난히 수줍움이 많아 원고지를 받는 줄서기에서도 이탈해 있었고, 오랫동안 원고지조차 받아가지 못하고 쩔쩔 맸었다. 그러나 아이는 참으로 소중한 용기를 내 주었고 내게서 마지막 원고지를 받아갔고 마지막에 원고지를 가져왔었다. 아니다. 그 중간쯤이던가. 놀란 토끼 눈으로 찢어진 원고지를 바꿔가기도 했으니 내 기억의 창고에 오래도록 있는 아이다.

여기, 유월의 햇살에 연녹색의 물기머금은 한 그루 나무가 있다. 조용한 나무 곁으로는 그동안 수없이, 정말이지 수없이 많은 것들이 곁에 있었고 지나갔을 것이다. 어떤 것은 길게 머물렸을 것이고, 어떤 것은 짧게 머물렸을 것이다. 또 어떤 것은 깊은 흔적을 남겼을 것이고, 어떤 것은 작은 향기만 남겼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사라졌지만 영혼의 정원에 물을 주는 이가 있고 사랑이라는 거름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나무는 짙은 푸름을 향해 무한 성장할 것이다. 새싹이었을 때 다정했던 흙의 온기, 어린 나무였을 때 찾아와 준 바람, 폭우속에서 함께 흔들렸던 작은 생명들까지도 잊지 않고 분명 나무 안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운 건 비단 부모님의 정성만은 아니리라. 일 년을 함께하고 헤어진 친구들과의 이별도, 다시 만난 새 친구들의 새로운 재잘거림도 한 몫 했으리라. 철철이 바꿔서 불어오는 계절풍의 냄새와 톡톡 창문을 두드리며 찾아오는 변하는 빗줄기의 소리도 아이의 생각과 느낌을 더 키웠을 것이다. 그 뿐이랴. 요양원을 전전하는 할머니의 안타까움도, 홀로된 할아버지의 외로움도 아이의 어느 내면 한 곳에서 한 뼘 자라는데 기여 했을지도.

나무의 키를 키우는 여름날에도 새를 내려 앉게 하는 겨울날에도 아이는 자랐을 것이며, 뒤뜰의 모란 한 송이 길가의 민들레 한 포기도 아이의 성장을 가만히 도왔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다채롭고 풍요로운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와 서점에서 골라낸 향기로운 책 한 권의 냄새에서도 깊이있는 사유와 자발적인 탐구의 기쁨도 기여했을 터였다.

지금 아이는 또 다시 백일장이라는 곳에서 사회적인 자아 안에 깊이 숨어 있는 또 하나의 나 자신과의 가장 아름다운 대화법인 글 쓰기를 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닫힌 문을 두드리고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자신의 아픈 마음과 대화하는 글을 쓸 것이다. 세상에 지친 어른과 달리 힘찬 희망과 에너지로 일년이라는 소중한 성장의 시간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설령 실패하고 넘어져도 지금은 수많은 기회가 열려 있는 도전의 과정일 뿐이기에 응원한다.

유월, 들녘의 풋내가 들큼한 맛이다. 어느 듯 반토막 난 일년의 시간이 숙성되어 가는 맛이다. 곧 막걸리 같은 텁텁한 냄새로 들녘을 푹 절게 할 것이고 달콤한 냄새와 맛으로 결실을 가져 올 것이다. 삼라만상의 숨탄것들이 성장의 끈을 바투 잡고 감각을 되살리며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유월의 왕성한 성장의 기운 탓이다.

사람이라고 이와 다르지 않다. 모든 아이들에겐 변화하고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꿈꾸고 도전하는 아이로 기르는 인성교육에서부터, 아이들을 마음을 응원하여 우리 사회의 건강한 미래로 키울 수 있는 사람. 누구에게서든 사랑받으며 온전한 인간으로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사람. 바로, 유월의 우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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